더 북한 김영희 칼럼

남북관계, 파국인가 동면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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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북한은 연초부터 남한에 스토킹 수준으로 회담을 요구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의지는 지미 카터 편에 보낸 메시지로 확인됐다.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북·미회담을 갈망하는데 미국은 남북대화를 먼저 하라고 한다. 그래서 북한은 첫째는 북·미회담의 조건 충족을 위해서, 둘째는 김일성 탄생 100주년과 강성대국 입문이 겹치는 내년에 돈이 많이 드는 잔치에 쓸 남한의 지원이 아쉬워 핵협상을 포함한 대화도 좋다고 방향을 잡았다.

 그런 북한이 왜 베이징 남북 비밀접촉의 내용을 폭로하고 남북대화를 걷어찼단 말인가. 북한이 판을 엎은 유력한 배경으로 거론되는 것이 세 가지다. 첫째, 북한은 천안함·연평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남한의 입장이 여전히 강경한 데 좌절했다. 둘째, 남한 예비군 훈련장에 김씨 왕조 3대의 사진이 사격표적으로 내걸린 것은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이었다. 당연히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남한을 공격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셋째는 김정일이 베이징에서 만난 원자바오 총리가 도쿄에서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남북 비밀접촉의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는 데 격노했다. 북한은 중대사를 발표하거나 제3자에게 알리는 것은 항상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우리 측 사과요구가 북한으로 하여금 판을 깨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는 데 반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정책을 담당했던 핵심 인사들은 김씨 왕조 3대를 사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 북한을 격앙시켰다고 본다. 과거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1997년 북한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현장에서 남한 근로자들이 김정일 사진이 실린 노동신문을 찢은 사건으로 경수로 사업 자체가 날아갈 뻔했다.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때는 비가 내리는 날 북한 선수단을 환영하는 플래카드에 실린 김대중·김정일의 악수하는 사진을 본 북한 응원단과 선수들이 장군님이 저렇게 비에 젖다니라고 울면서 플래카드를 거두어 갔다. 최고권력이 이동하고 자리이동과 줄서기가 횡행하는 시기에 충성경쟁은 더욱 광적이다.

 북한 대표들은 사과문제에 대한 남한의 양보를 기대하고 비밀회담장에 나갔다. 그러나 남한 대표들을 만나보니 남한이 암시한, 남한은 사과받았다고 발표하고 북한은 사과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과 부인 방식(Apology denial formula)’보다 더 명백한 사과를 요구하는 데 좌절했다. 그들의 강력한 요구로 김태효 청와대 전략비서관이 뒤늦게 회담에 합류했지만 남한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북한 대표들은 경비지원을 하겠다는 남한 측 제의를 일이 잘되거든 달라는 말로 거절했다. 결국 정상회담도 핵협상도 북한 몽니와 사과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북한이 판을 뒤집기에 이르렀다. 북한 대표들은 귀국 후에 숙청을 당했다는 확인 안 되는 소문까지 나돈다.

 그런 와중에 나온 것이 국방위원회 내부의 권력투쟁설이다. 정부 소식통도 북한이 국방위원회 대변인 이름으로 베이징 비밀회담을 폭로한 것은 권력승계와 관련된 국방위와 군부 내의 권력투쟁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국방위는 김정일을 위원장으로 한 북한 최고 권력기관이다. 그런 국방위에서 김정일의 통제나 시야를 벗어난 권력승계와 관련된 권력투쟁이 벌어져 남북비밀 접촉의 내막을 폭로하는 추태를 부렸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비밀회담이 결렬된 책임의 일단이 남한의 미숙한 일 처리에도 있다면 국방위 권력투쟁설은 남한 측의 책임회피에는 유용할 것이지만 현실진단으로는 많이 미흡하다.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고민이 깊지 싶다. 이 대통령의 국내정치 성적표는 초라하다. 비리와 갈등의 먹구름이 이명박 청와대 주변을 뒤덮었다. 남북관계에서 뭔가 이루고 싶은데 북한이 광태를 부리고 참모들이 강경자세를 안 풀어 판이 깨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내심을 갖고 계속 노력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자세다.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도는 위험수위에 육박한다. 협상이 없으면 북한은 핵·미사일 재고를 크게 늘릴 것이다. 정부 차원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재개하고, 충분한 사전협의를 하면서 북한과 대화하는 것 말고 대안이 있는가. 사과문제도 ‘사과 부인 방식’이 가장 현실적이다. 명백한 사과를 요구하는 한 생산적인 대화는 기대할 수 없다. 김정일도 김대중·노무현 시대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향수를 접고, 차기 정부는 좀 낫겠지 하는 환상을 버리고, 진지한 목적의식을 갖고 대화의 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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