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교육 갖고 장난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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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한국에서 교육은 예민한 사안이다. 손만 대면 폭발한다. “하나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약속은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사교육비 줄이겠다”는 다짐에 지지율은 팍팍 오른다. 그만큼 정치적 유혹도 강하다. 문제는 후유증이다. 어차피 대학 문호는 한정돼 있다. 수능이 끝나면 어김없이 불만이 들끓었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큰 법이다. 수능이 쉬워도, 너무 어려워도 모든 비난은 정부로 향한다. 수능 17년의 역사는 말썽의 역사였다.

 수능 난이도를 교육 전문가들이 조절한다고? 천만에! 한국에선 대통령의 의지가 좌우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쉬운 수능이 원칙이었다. ‘물 수능’이 이어졌다. 그 절정이 1점 차이로 학과가 아니라 지원 대학이 뒤바뀐 2001학년도 수능이었다. 온갖 음모론이 판쳤다. 부담을 느낀 정부는 다음해 최악의 ‘불 수능’ 카드를 꺼냈다. 그 희생자가 ‘이해찬 세대’다. 수많은 수험생이 시험을 치다 고사장을 울며 떠났다. 나흘 뒤 김 대통령은 “정부 약속을 믿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충격을 드려 유감”이라고 사과했다. 곧바로 지지도는 15%로 추락했다.

 노무현 정부도 수능에 손을 댔다. 대표적 실험이 2008학년 수능 등급제였다. 서열화를 막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끔찍했다. 1점 차이로 억울하게 등급이 엇갈리는 폐단(弊端)을 낳았다. 1등급 학생들조차 입시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행정소송이 난무했다. 그해 실험도구가 된 학생들은 자신들을 ‘저주받은 89년생’이라 불렀다. 등급제는 욕만 잔뜩 먹고 일년 만에 폐지됐다. 지지율 폭락으로 노 정부는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졌다.

 올해 수능도 불길한 조짐이다. 휘황찬란한 다짐들을 너무 많이 쏟아냈다. “수능 과목별 만점자 1%” “EBS와 연계율 70%”…. 하지만 벌써 역풍이 거세다. 평가원이 EBS 교재를 베껴서 낸 6월 모의고사부터 도마에 올랐다. 수험생들 입에서 “물 수능은 내년 선거를 위한 포퓰리즘”이란 표현이 나돈다. “정부 압력에 반발한 평가원의 쿠데타”라는 음모론까지 퍼지고 있다. 사이버 공간은 사설학원 원장이 올린 ‘수능은 죽었다’라는 동영상이 장악했다. 평가원 게시판의 424개 글 가운데 400여 개가 비난 일색이다.

 수능 만점자 1%는 정치적 구호나 다름없다. 지나친 욕심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두 1등급을 받아도 서울 중위권 대학에 눈치 보기를 해야 한다. 대혼란은 불보듯 뻔하다. 더구나 올해와 내년은 수능 응시 인원 70여만 명으로 사상 최대다. 베이비붐 2세대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멍에다. 자칫 정치가 인위적으로 수능에 개입하면 대재앙(大災殃)을 부를 인화물질이 도처에 널려 있다. 평가원과 교과부를 넘어 정권 자체를 뒤흔들 파괴력을 갖고 있다.

 이제라도 섣부른 약속부터 거둬들여야 한다. 그나마 전두환 정부는 힘으로 졸업 정원제를 밀어붙여 입시 과열을 잠재웠다. 지금은 그런 극약 처방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스스로 욕심부터 자제해야 한다. 단칼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덤비지 말고, 입시 과열을 적절히 관리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수능 역사상 지난 3년은 별 탈 없이 넘어간 축이다. 그런데도 평가원장을 교체하고, 정치권과 정부가 친절하게 수능 난이도까지 주문하고 있다. 이제라도 평가원의 판단을 믿고 “적절한 수능을 출제해 달라”는 선에서 멈추는 게 옳을 듯싶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다행히 내년을 고비로 수능 응시자는 해마다 2만 명씩 줄어든다. 올해 초 아이들이 없어 최대 유아복 업체인 베비라가 파산했다. 한때 시가총액 1조4000억원을 넘보던 사교육업체 M사의 시가총액은 1조원으로 줄었다. 눈치 빠른 외국인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손을 뺐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아이들을 대상으로 너무 많은 실험을 했다. 아무리 훌륭한 의도라도 결국 그들 가슴을 멍들게 했을 뿐이다. 지긋이 참고 지켜보는 게 어른 세대의 도리일지 모른다. 더 이상 교육을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한다. 정치가 수능에 개입하면 항상 뒤끝이 좋지 않았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