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먹을 권리도 인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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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미국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가 4박5일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지난 주말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그와 함께 간 7명의 북한식량평가팀은 아직 현지에 남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평가 결과는 조만간 보고서로 작성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거쳐 백악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보고서를 놓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햄릿의 고민에 빠질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오바마의 고민은 이미 끝났다고 한다. ‘정치적 사안과 인도적 사안은 분리한다’는 미 정부의 원칙에 따라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것이다. 킹 특사를 단장으로 한 평가팀을 평양에 보낸 것은 식량 지원을 위한 일종의 수순 밟기로, 지원에 반대하는 미국 내 보수파와 한국 정부를 의식한 명분 쌓기라는 것이다.

 미 평가단의 제한된 인력과 짧은 조사 기간을 고려할 때 2개월 전에 나온 세계식량계획(WFP)팀의 평가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엔 산하 기구인 WFP는 한 달여에 걸친 광범한 현지 실사 결과를 바탕으로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약 600만 명의 주민, 특히 여성과 아동의 건강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결론짓고, 지난달 말 대북 긴급 구호 캠페인에 돌입했다. WFP는 즉각 구호 대상을 350만 명으로 잡고, 이들에게 제공할 35만t의 식량 구입에 필요한 2억2500만 달러를 모금 목표액으로 설정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언제, 얼마를, 어떤 방식으로 주느냐를 놓고 고심 중이다. 들리는 말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2008년 북한에 지원하기로 약속한 50만t 중 아직 집행되지 않은 33만t의 일부를 여러 조각으로 나눠 매달 일정량씩 보내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분배의 투명성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지원을 중단한다는 엄격한 단서도 달 모양이다. 품목도 쌀보다는 밀가루와 보리, 옥수수 등 전용이 어려운 것들로 구성할 방침이라고 한다.

 WFP가 확성기에 대고 대북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아직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한 편이다. 러시아 500만 달러, 브라질 495만 달러, 스위스 397만 달러, 캐나다 250만 달러 등 9개국과 유엔 등 국제기구가 약 3000만 달러를 기탁했지만 목표액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관건은 미국이다. 미국이 행동에 나서면 유럽연합(EU) 회원국 등 다른 나라들도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EU는 자체 평가팀을 다음 주 북한에 보낼 예정이다.

 대북 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들고, 고위층용 사치품을 사들이는 데는 돈을 펑펑 쓰면서 자기 백성은 굶기는 김정일 정권의 부도덕성과 이중성을 질타한다.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쓰는 연간 4억~5억 달러의 돈이면 식량난 해소에 필요한 2억~3억 달러를 충당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도 있다. 지원된 식량이 필요한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북한 정권의 배만 불린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북한이 식량난을 부풀리는 측면이 있다며 식량난의 실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식량난의 근본 원인은 북한 체제 자체의 모순에 있는 만큼 이를 개선하는 노력을 보이기 전에는 도와줘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천안함과 연평도 문제가 있다. 악랄한 무력 도발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 북한에 식량을 준다는 것은 심정적으로 용납하기 어렵다. 통일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70%가 무력 도발에 대한 사과가 있기 전에는 식량을 지원해선 안 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대북 식량 지원에 나서선 안 될 이유가 아흔아홉 가지라면 나서야 할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다. 먹을 게 없어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데, 인간된 도리로서 모른 척할 순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식량난은 정권의 잘못이지 주민들의 잘못은 아니다. 가장 잘못 만난 탓에 가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남의 집 일이라고 못 본 척할 순 없는 일 아닌가. 아무리 가장이 밉더라도 굶는 가족은 일단 살려놓고 보는 것이 인도주의다.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이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도 ‘식량권(right to food)’을 인권의 주요 요소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인권특사를 식량평가팀장으로 평양에 보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먹을 권리도 인권이다. 북한 인권을 문제 삼으면서 식량 지원엔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식량 지원을 주장하면서 북한 인권을 외면하는 것도 잘못이다. 굶어죽게 생긴 사람은 일단 살려놓고 보는 것이 우선이다. 죽고 나면 인권이 무슨 소용인가. 먹을 것을 가지고 동물을 길들이듯이 식량을 매개로 인간의 행동과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인권을 말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이제 정리할 때가 됐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일러스트=강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