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증거를 스크린에 띄워 보시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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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전 서울 신정동 남부지방법원에서 처음으로 민사 전자소송 집중심리가 열렸다. 법원은 개정에 앞서 취재진에 법정 안에 설치된 컴퓨터와 벽면에 걸린 스크린 등을 공개했다. [김도훈 기자]

30일 서울남부지방법원(법원장 유승정)과 대구지방법원에서 민사재판이 전자소송 방식으로 진행됐다. 전국 법원 중 처음이다. 이날 법원은 예외적으로 기자들의 노트북·녹음기 소지를 허용했다. 본지는 라이브(live) 법정을 통해 전자소송 법정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오전 10시, 서울남부지법 416호 중법정. 전자소송 전담합의부인 제11민사부 최승록 부장판사가 배석들과 법정에 들어섰다. 최 판사는 법정 왼쪽 벽면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과 각 책상 위에 설치된 컴퓨터를 둘러봤다. 최 부장판사는 “오늘 재판은 사안이 복잡해 단순히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어 전자소송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이날 재판은 기관투자가가 자산운용사의 권유로 헤지펀드에 투자했으나 그 펀드가 사기 형태로 운용된 것이 밝혀지자 자산운용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었다. 원고 측과 피고 측 대리인은 이미 재판부에 인터넷으로 제출한 파워포인트 자료를 스크린에 띄우고 구술변론을 시작했다.

 ▶정진수 변호사(원고 측)=자산운용사라면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투자할 펀드의 투명성, 위험노출 정도, 준법 여부 등을 사전에 따져야 합니다. 피고들은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나 내부 검토 보고서조차 제출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제대로 된 투자 절차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최 부장판사=피고 측 대리인, 그 말이 맞나요?

 ▶이상윤 변호사(피고 측)=아닙니다. 사전에 회의했던 자료, 투자제안서 등 증거를 제출했습니다.

 ▶최 부장판사=스크린에 띄워 보시죠. (이 변호사가 스크린에 수익성, 손실관리 등을 수치화한 내용의 증거자료를 띄우자 이를 지켜본 뒤) 일부는 분석을 한 흔적이 있네요.

 ▶정 변호사=그렇지만 저 보고서엔 저런 수치가 나온 과정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양측 변호인단은 투자제안서, 기사 스크랩, 계약서 자료, 과거 판례, 영상물 등 소송에 필요한 증거자료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스크린에 올렸다.

 재판부는 이날 심리를 위해 휴일인 지난 주말 출근해 리허설도 했다. 최 부장판사는 “전자소송 도입 취지는 종이기록을 모두 전산화해 민원인들의 편의를 돕자는 것”이라며 “막상 전자법정을 해보니 스크린이라는 하나의 ‘마당’을 놓고 함께 합의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김상훈 공보판사는 “IT환경에 맞는 전자소송을 통해 글이나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내년엔 형사를 제외한 모든 재판을 전자소송으로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전자소송=재판 당사자가 소장과 소송 관련 서류를 인터넷으로 제출하고, 법정에선 멀티미디어 증거자료를 이용해 원고와 피고가 변론을 하는 ‘종이 없는 재판’을 말한다. 지난해 특허법원에 먼저 도입됐고 이달부터 민사재판으로 적용 범위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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