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헨드릭스는 열광할 수 있어 좋고 클래식은 고통스럽지만 낯설어 묘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0호 31면

구스타프 말러(사진)의 음악은 어렵고 길지만 몰두하면 매니어가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올해는 말러의 사망 100주년이다. [중앙포토]

이제 음악이 아니고 드라마의 시대다. 음악성을 뛰어넘어 드라마틱한 감동 추구의 시대로 넘어갔다. 필리핀의 빈민소녀 샤리스 펨핑코가 오프라 윈프리쇼 출연을 계기로 단숨에 미국 팝계의 총아로 올라서는 모습을 보라. 셀린 디옹, 휘트니 휴스턴을 필두로 최고 반열의 가수들이 너도나도 10대 소녀 샤리스와 듀엣 무대를 꾸미고 나선다. 폴 포츠의 성공담, 엘 시스테마-기적의 오케스트라가 그렇고 감동 사례들은 널리고 널렸다. 연초의 세시봉 콘서트, 요즘의 임재범 폭풍도 결국 인생사의 간난신고가 녹아들어 폭발성을 보인 것 아니겠는가. 주 원인은 역시 인터넷 발달과 연관되어 보인다. 노래와 뮤지션을 둘러싼 이야기가 웹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넘쳐난다. 이야기가 있어야 사람들은 반응한다. 음악만이 아니다. 심지어 내년 대통령 선거도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詩人의 음악 읽기 나를 감동시킨 음악가들 <下>

20세기가 낳은 최대 유산은 록음악
드라마의 감동 이전에 음악은 어떤 가치로 존재했을까. 20세기 문화가 낳은 최대의 유산을 나는 록음악의 태동으로 본다. 흑인 블루스와 백인 컨트리가 결합해 젊은 세대, 노동자 계층의 음악으로 성장한 록은 이른바 ‘반항성’을 핵심 요소로 본다. 이견도 있겠지만,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정신이 록의 정점에 있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반항의 대상은 모든 기성의 것을 의미한다. 비주류, 반문명, 카운터컬처, 올터너티브 무브먼트 같은 것들이 록스피릿의 중심을 관통한다. 이 같은 록을 둘러싸고 있는 더 넓은 수원지가 팝음악이다. 위안과 휴식, 센티멘털리즘과 섹슈얼리티. 지금까지도 팝송 가사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가 엄마와 고향이다.

재즈는 한번도 대중적이었던 적이 없는 대중음악이다. 1920~30년대 미국 대도시 클럽의 댄스 음악인 스윙에서 출발해 자리에 앉아 감상하는 비밥 재즈로 정점에 올랐다가 이후 팝음악 또는 예술음악과 결합하는 퓨전의 흐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록의 반항, 팝의 위안과 같은 논법으로 재즈의 핵심을 찾자면 통상 자유를 말한다. 정확히는 음악적 자유로움이다. 연주의 패턴과 전개에 무한대의 자유로움이 열려있다. 이어서 월드뮤직. 영미권 즉 팝음악권이 아닌 모든 문화권의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용어로 80년대 이래 활성화됐다. 민속(트래디셔널) 음악과는 구분된다. 이탈리아의 칸초네나 프랑스의 샹송, 아이리시 포크도 다 월드뮤직으로 분류되지만 진짜배기는 비(非)서유럽권에 있다고 본다. 삶의 내력이 힘겹고 좀 못사는 지역의 음악들. 그래서 매우 자의적인 생각이지만, 월드뮤직의 에토스는 서러움과 극단적인 단순성 이 두 가지로 보인다. 엉엉 울듯이 부르거나 제 정신이 아닌 듯이 흥겨운 노래가 월드뮤직에 많다.

우드스톡에서 연주 중인 지미 핸드릭스.

문제는 클래식 음악이다. 한 20년 전에 음악인구의 7%쯤을 클래식이 점유한다는 집계를 보았는데 지금은 훨씬 더 형편없이 떨어졌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저 심해에서 눈만 껌뻑껌뻑 하며 살아남은 희귀 고생대 어류와 같은 처지다. 부레도 지느러미도 눈까지도 다 퇴화되어 수족관의 신기한 구경거리 노릇이나 한다. 그런데 놀라워라. 예술서적 가운데 그래도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클래식 음악 입문서다. 듣지는 않으나 알고는 싶다는 뜻이다. 음대도 망하지 않고 공연도 여전히 활발히 열린다. 이 괴이한 생존력을 어찌 보아야 할까. 상류 계층의 문화 코드로서 존립한다는 분석도 일리가 있다. 국가와 사회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연명한다는 설명도 또한 일리가 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이 존속하는 보다 핵심적인 까닭은 클래식 음악의 속성 자체에 있다고 보인다. 비대중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렵고 길다. 번거롭고 낯설다. 한마디로 즐겁게 하기보다 힘들게 만드는 면이 더 많다. 바로 이런 속성이 인간에게 고유하게 내재된 문화적 열망을 충동하는 것이 아닐까.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고 두꺼운 고전문학을 읽고 해독이 어려운 예술영화를 애써 감상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복잡성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려 의미와 즐거움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 한다.

바야흐로 인지 자본주의 시대
그런데 각 음악 장르에는 가치의 서열, 즉 높낮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대중음악보다 클래식 음악이, 팝보다 록이, 록보다 재즈가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일까. 계보학적으로 봐야 한다. 미술과 발레와 연극이 다르듯이 음악 내 장르들도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 필요한 것은 각 장르 안에 있는 진짜배기를 찾아내는 일이다. 왜 지미 헨드릭스를 떠받드는지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한 경외감이 그토록 큰지 빅토르 하라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알고 느끼고 즐기는 일. 그런데 그 같은 앎의 과정에서 가장 많은 내용물을 갖고 있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때는 바야흐로 인지 자본주의 시대라는 것 아닌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