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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역사는 살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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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진홍
논설위원

# 음력으로 4월 17일이었던 그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문경새재 옛길을 걸었다. 걷는 내내 419년 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이하 음력) 부산 앞바다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8000여 명의 왜군 1진을 태운 왜선이 가득 메웠다.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연이어 동래성을 쳤다. 그나마 동래부사 송상현이 반나절을 버텼지만 결국 이틀 만인 15일 왜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 후 왜군은 아예 거칠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 왜적의 침입 사실이 서울 조정에 알려진 17일 이후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벌어진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조선의 운명은 결정 났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당대에 이르기까지 500년 가까운 미래를 규정지었다. 왜적의 침략 소식을 듣고 대신들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임금을 뵙고자 했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촌각을 다퉈 중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최종 결정권자는 뒤에 숨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 급한 대로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경상도로 내려보내려 했지만 병사가 없었다. 병사라고 해야 대부분 관복을 입고 옆구리에 책을 낀 채 나온 아전과 유생들뿐이었다. 결국 이일은 사흘이 지나도록 전장으로 떠날 수조차 없었다. 『징비록』을 쓴 류성룡은 뒤늦게 오합지졸을 이끌고 나선 이일이 상주에 닿아 왜군과 맞닥뜨리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말을 버리고 의복도 벗어던진 채 머리도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고 적었다. 이것이 당대 조선 최고의 장군이란 이의 모습이었다.

 # 이일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벌써부터 도망칠 궁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상륙한 지 불과 10여 일 만에 상주까지 파죽지세로 치달은 왜군 역시 처음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상주에서 문경 가는 길에 험준한 산세에 고모성이라는 옛 성이 있는데 왜군은 조선 병사들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척후병을 보내 몇 번씩이나 살펴보며 시간을 지체했다. 하지만 조선의 병사는 아예 없었다. 다만 조선의 험준한 지세만이 왜군을 하루라도 멈추게 했을 뿐이다. 만약 도망갈 궁리가 아니라 제대로 싸울 궁리를 했다면 왜군의 그런 심리와 상황을 간파해 역공할 수 있었을 텐데….

 # 당시 영남에서 서울로 오려면 조령, 죽령, 추풍령 중 한 곳을 지나야 했다. 왜군 1진은 조령을 택했다. 바로 문경새재다. 그 조령에서 매복해 승부를 냈어야 했는데 조선 제일 명장이라 불리던 신립(申砬)은 어찌된 일인지 뒤로 물러나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 결과는 참담했다. 후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퇴각하는 왜군을 쫓아 조령을 지나가다 이렇게 탄식했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훗날 숙종 때 만들어진 조령 3관문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마패령을 올라 주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서 바라보면 조령의 깊은 협곡이 더욱 뚜렷하다. 임진년 당시 이 협곡에 매복해 양쪽에서 화공이라도 펼쳤다면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 신립 장군의 패착의 근본 원인은 오만(傲慢)이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열흘 전쯤 류성룡이 왜군의 조총을 경계하라고 말하자 신립이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 신립은 기마용병에 능한 장수로 두만강 유역 등 북방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그 성공 전력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신립은 자신의 기마용병술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조령에서의 매복작전을 거두고 대신 탄금대에서의 일전을 꾀했다. 물론 그것은 결정적 패착이었다. 그 패착이 그 후 500년 세월을 규정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역사는 가정(假定)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 교훈은 남는다. 밖에서 쳐들어오는 것만 적이 아니다. 진짜 큰 적은 내 안에 있다. 오만이 그것이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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