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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남은 고엽제, 1978년 왜관 미군기지에 묻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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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78년 주한미군이 고엽제로 쓰이는 독성물질을 묻은 곳이라는 증언이 나온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캠프 캐럴 기지. [칠곡=연합뉴스]

사진은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KPHO-TV에 “한국에서 독성물질을 매장했다”고 증언한 주한미군 병사가 포함된 당시 근무 사진. KPHO-TV가 이 사진을 공개했다. [칠곡=연합뉴스]

주한미군이 1978년 한국의 미군기지에 고엽제로 쓰이는 독성물질을 묻었다는 증언이 미국 언론에 보도돼 파문이 일고 있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KPHO-TV는 16일(현지시간) 경북 칠곡군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근무한 적이 있는 3명으로부터 이 같은 증언을 받아 방송했다. 이 방송 웹사이트에 따르면 캠프 캐럴에서 중장비 기사로 복무했던 스티브 하우스는 인터뷰에서 “1978년 어느 날 도시 한 블록 규모의 땅을 파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처리할 게 있다면서 도랑을 파라고 했다”며 “파묻은 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매장 물체는 밝은 노란색이거나 밝은 오렌지색 글씨가 써진 55갤런(약 200L)짜리 드럼통들이었다. 일부 드럼통에는 ‘베트남 지역 컴파운드 오렌지’라고 적혀 있었다. 드럼통 안에 든 물질은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사용했던 고엽제를 지칭한다. 고엽제 매립이 사실일 경우 30년 이상이 지나 드럼통이 부식돼 주변 토양과 지하수가 오염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당시 하우스와 같이 복무했던 로버트 트라비스는 창고에 250개의 드럼통이 있었으며 이 드럼통을 일일이 손으로 밀고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현재 웨스트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트라비스는 실수로 드럼통에서 새 나온 물질에 노출된 후 온몸에 붉은 발진이 생기는 등 건강상 문제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국의 환경부는 19일 열린 한·미 행정협정(SOFA) 환경분과위원회에서 주한미군 측에 관련 사실 확인을 촉구했다고 이날 밝혔다.

 이와 관련, 주한 미8군사령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한 미8군 공보관 제프 부치카우스키 중령은 이날 e-메일로 밝힌 입장자료에서 “관련 증언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지 파악하는 한편, 환경전문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 자문을 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하수 오염 가능성에 불안감=고엽제로 쓰이는 독성물질이 캠프 캐럴에 매립됐다는 주장이 나오자 칠곡 주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주민들은 2003∼2004년 미군 부대에서 기름이 유출된 적이 있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칠곡에 사는 이근하(53)씨는 “미군이 지역에 일자리를 제공해 고맙게 생각하는 주민이 적지 않다”며 “하지만 맹독성 고엽제를 몰래 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주민 박모(50)씨도 “고엽제가 묻힌 것이 사실이라면 이전에 있었던 기름 유출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정부는 즉각 사실 확인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강찬수(환경전문)·김수정 기자, 칠곡=홍권삼 기자

◆고엽제=초목을 고사시키는 다이옥신계 제초제다. 발암물질이자 청산가리의 1만 배에 해당하는 독극물인 다이옥신이 포함돼 있어 인체에 들어가면 각종 암과 신경마비 등 심각한 건강 장애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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