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8) 어머니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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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상을 받았지만 첫사랑이 시상자로 나섰던 65년 시민회관 시상식장을 잊지 못한다. 영화배우 문희(왼쪽)씨와 동반 수상한 60년대 한 영화제에서. [중앙포토]


한 번 터진 두 처녀 배우들의 웃음보는 5분 내내 멈출 줄 몰랐다. 엄앵란과 최지희는 웃음을 그칠 만하면 내 얼굴을 다시 보고 킥킥거렸다. 영화 ‘새엄마’ 촬영은 엉망이 됐다. 불과 한 시간 전에 혜화동 여인을 만나고 온 터라, 내게 약간의 죄의식이 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묻은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왜 저럴까.

 가만 보니 두 사람의 눈은 내 목덜미로 향해 있었다. 거울을 보니 목덜미에 키스 마크가 시커멓게 나 있었다. 혜화동 여인이 내 목을 심하게 압박한 것이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풋내기 배우가 아니었다. ‘가정교사’ ‘사나이의 눈물’ ‘김약국의 딸들’ 등이 1963년 같은 해에 출연한 작품들이었다. 태연하게 상황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태프를 향해 웃으며 소리 질렀다.

 “그만 웃고. 자 자, 슈팅 갑시다.”

 두 사람은 내게 어디 갔다 왔느냐며 물었다. 돌이켜 보니, 당시 엄앵란뿐 아니라 최지희도 내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나를 성실하고 전도유망한 남자로 본 것 같다. 키스 마크를 낸 여자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사실을 직감한 엄앵란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날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여자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하지 않았나 싶다. 이후 엄앵란은 내가 촬영 중간에 어디로 사라지지 못하게 감시하고, 점심 도시락까지 싸오는 등 나를 챙겨주였다.

 혜화동 여인이 준 롤렉스 시계는 가회동 하숙방 책상에 올려놓고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 방에는 배우 생활 중에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물건이 쌓여갔다. 촬영장과 연락하기 위해 백색전화를 놓았다. 갖가지 옷과 이불 보따리도 사들였다.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하시며 모든 물건을 관리했다.

 어느 날 롤렉스 시계를 눈 여겨본 어머니가 “이 시계 어디서 났어?”라고 물어왔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하고 촬영장으로 나가버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어머니와 혜화동 여인이 처음으로 대면을 했다. 혜화동 여인은 내 겉옷과 속옷을 세탁해 가회동으로 들고 왔는데, 마침 어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머니는 인사만 하고 그 여인의 전화번호를 받아놓았다.

 얼마 후 어머니는 혜화동 여인을 찾아갔다. 내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는 “당신과 우리 아들은 안 맞는다. 우리 아들은 영화계에서 크게 될 인물이니 그만 만나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 여인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두 여인은 그 자리에서 서로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 여인과의 관계를 정리시켜준 셈이다.

 그로부터 2년 후 한 영화잡지가 주최한 영화 시상식이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한 회사가 그 행사의 스폰서로 나섰다. 수상자로서 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서 있는데 그 여인이 시상자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혜화동 여인은 눈으로만 내게 인사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둘만 아는 인사였다.

 상을 받으면서 악수를 하는데 그 여인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건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내 눈에도, 그 여인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 날의 부상(副賞)이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게 내가 본 혜화동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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