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신호등 결단, 정책 소통의 롤모델 삼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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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조현오 경찰청장은 어제 “화살표 3색 신호등을 확대 설치하는 계획을 무기한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전면 철회다. 이로써 지난달 20일 시범운영을 시작한 신호등 교체사업은 한 달도 안 돼 폐기됐다. 이렇게 신속하게 거둬들인 것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때문이다. 그나마 조 청장이 발 빠르게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해 수천억원의 예산 낭비와 국민 불편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본지는 지난달 21일부터 새로운 신호등 체계의 불합리함을 수없이 지적해 왔다. 글로벌 기준도 아닐뿐더러 시민들이 불편함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사안을 전문가 몇몇이 둘러앉아 결정하고는 그대로 강행해서는 안 된다. 글로벌 표준이라고 했지만, 선진국은 자국의 교통문화와 관습에 따라 제각각 다른 신호체계를 가지고 있다. 현지답사도 지극히 특수한 사례만 수집했다. 오히려 불편만 가중하는 정책을 위해 서울시만 850억여원, 전국으로는 수천억원을 쏟아부을 뻔했다. 더군다나 신호등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린 문제다. 조 청장이 인정한 대로 “신호등이란 것은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분석한 것보다 일반 국민이 편리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조 청장은 이러한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했다. 공청회에서 경찰이 열심히 홍보했지만 끝난 뒤에도 참석자들은 절반이 반대했다. 포털사이트 여론조사에서는 90% 가까이 반대했다. 조 청장은 “겸허하게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과감하게 여론을 받아들였다.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국민 여론을 정책에 신속하게 반영해 결단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시민 생활과 직결된 정책은 소통이 우선이다. 비록 전문가 판단에 합리적이더라도 차근차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반대 의견도 충분히 경청해야 한다. 다 결정한 뒤 요식 절차가 아니라 정책 형성 단계에서부터 여론을 반영해야 한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이번 일을 잘 돌아보고 정책 추진 과정에 소통을 강화하는 새로운 롤모델로 만들어 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