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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7) 김일성과 펑더화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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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전황에 따라 표정이 수시로 바뀌곤 했다. 얼굴이 곧 전쟁 상황판이었다. 성격도 급했다. 대신 음흉하지는 않았다. 1955년 10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과 건배하는 펑더화이. 원수 계급장을 받은 직후였다. [김명호 제공]

1951년 6월 초,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보낸 전보를 받았다. “미국이 우리에게 정전을 주선해 달라고 한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알려주기 바란다.” 마오도 답전을 보냈다. “미국의 의도가 불분명하다. 정말 화해를 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같은 달 중순, 김일성이 베이징에 나타났다. 중국지도자들과 여러 차례 회담했다. 말이 회담이지 밥 먹고 차 마시며 나누는 대화였다. 양측은 기본적으로 정전에 합의했다.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김일성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쪽에서는 한 사람만 가면 된다”며 동북인민정부 주석 가오강을 딸려 보냈다. 가오강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스탈린이었다. 동북의 모든 건물에 자신과 스탈린의 사진만 나란히 걸어 놓게 했다. 가오강 만세는 불러도 마오쩌둥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마오쩌둥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가오강과 김일성을 만난 스탈린이 “이건 너희들이 이긴 전쟁이다. 미국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 우리 보고 중간에 나서 달라고 3차례나 요구했다. 처음에는 모른 체 했지만, 이제는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한다”면서 현지 상황을 구체적으로 물었다. 가오강은 물론이고 김일성도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짜증이 난 스탈린은 전화로 소련군 부총참모장을 불렀다. 북한 땅에는 소련인 고문이 약 3000명 정도 있었다.

부총참모장이 한반도 지도를 들고 들어왔다. 전황을 설명하고 나가자 김일성이 펑더화이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입에 침이 튀겼다. “펑더화인지 뭔지 정말 고집불통이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걸 혼자서 멋대로 결정해 버린다. 성질이 어찌나 못돼 먹었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스탈린이 그만하라며 눈치를 줘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하는 말이나 들으라며 소리를 꽥 지르자 그제야 “에이, 펑가 놈 때문에 조국통일이고 뭐고 다 망쳐버렸다”며 입을 닫았다.

펑더화이와 김일성은 충돌이 잦았다. 서로 주먹질하고 따귀까지 때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럴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선봉이 북위 37도선에 도달했을 무렵 펑더화이는 공격을 중지시켰다. 중공군 주력도 서울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1월 5일, 중·조연합군 사령부에서 고급간부 회의가 열렸다.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조선인민군 총고문을 겸하고 있던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자레프도 참석했다. 펑더화이는 2시간 늦게 나타났다(이 일 때문에 후일 마오쩌둥에게 야단을 맞았다).

펑더화이의 운전병은 회의 시작 전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속전속승(速戰速勝)이 가능한 전쟁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추격을 멈추는 전쟁은 고금을 통해 없었다. 펑더화이는 우파분자다. 스탈린 동지에게 불려가 교육을 좀 받아야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회의 준비하느라 들락거리는 운전병이 러시아어에 능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김일성이 “의논 한마디 없이 철수나팔이나 불어대고, 연극 한번 잘한다”고 빈정대자 펑더화이의 안색이 금세 변했다. 중공군은 식량과 탄약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미군의 공습으로 도로와 교량이 거의 파괴되다 보니 보급이 불가능했다. 야채를 먹지 못해 야맹증 환자가 속출했고 각기병과 동상으로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회의는 고성이 오갔다. 서로 치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쿠당탕탕 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불과 5개월 전 일이었다.

통역으로 따라갔던 스저(師哲·사철)도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가오강과 김일성은 스탈린과 회담하며 정화(停火), 정전(停戰), 휴전(休戰)이라는 용어를 구분 없이 사용했다. 스탈린이 “정화는 시신 수습이나 부상병 운송 등을 위해 몇 시간이나 며칠간 전쟁을 멈추는 것이고, 장기간 교전을 중지하는 것이 정전과 휴전이다. 전쟁상태가 해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재발해도 이상할 게 없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한 후 “너희들이 바라는 게 뭐냐”고 물었다. 세 사람은 정전에 합의했다.

스탈린은 “바라는 것이 분명해졌으니 미국사람들 이해시키기가 쉽겠다. 정전하기 전에 진지 조정을 잘해라. 일주일이면 족하다”며 끝을 맺었다. 마오쩌둥이 “빨리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면 천천히 이겨도 된다. 급할 게 없다”고 시간을 끌며 소련 측에 계속 군수물자 지원을 요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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