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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시트콤〈순풍산부인과〉의 김병욱PD

중앙일보

입력

전화로 수다를 떨다가 '어제 미달이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남자들도 출근해서 '영규가 불쌍해'라고 말한다. 〈순풍 산부인과〉의 모든 주인공이 친근한 가족 혹은 친구 같다. 5일간의 대본작업, 이틀간의 촬영으로 시트콤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김병욱 PD가 들려주는 〈순풍 산부인과〉 그 뒷이야기.

국내에 실제로 〈순풍 산부인과〉가 있는지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더니 부산에 한 곳, 서울 휘경동에 한 곳이 있었다.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와 진짜 '순풍 산부인과'. 누가 먼저였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곳에선 재미난 일로 가득할 것 같다.

드라마 〈순풍 산부인과〉를 순풍에 돛단 듯 이끌고 있는 김병욱 PD(38세·JJ프로덕션). 연출자들을 만나다 보면 자신이 연출하는 작품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경우가 많은데, 두꺼운 무테 안경을 쓰고 있는 김병욱 PD에게서는 〈순풍 산부인과〉의 웃음이 절로 나는 분위기를 쉽게 발견할 수가 없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끼고, 이야기를 하다가 박장대소를 해야 할 대목에서도 작은 미소만을 짓는다.

★ 완벽한 대본, 웃음의 리얼리티, 생활주변의 소재가 인기 비결

2년째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어린이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순풍팬'을 만든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는 우리 방송사에 남을 만한 여러가지 기록을 지니고 있다. 그 첫번째는 4백 회가 넘도록 방영되고 있는 최장수 시트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록은 무명의 배우 혹은 시쳇말로 '한물 간 배우'가 출연해도 다시 인기스타로 새롭게 연기생활을 펼쳐간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방송국은 시청률이 좋아서 웃고, 출연자들은 폭넓은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얻어 즐겁고,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재미난 줄거리에 폭소를 터트린다.

하지만 한 편의 〈순풍 산부인과〉가 탄생하기까지는 그렇게 웃을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난산에 난산을 거듭한다. PC통신을 통해 아이템을 제작진에게 제공하는 10명의 사이버 작가를 비롯, 직접 대본을 쓰는 여섯 명의 작가의 머리를 쥐어짜는 작업을 통해 탄생한다. 소재는 무척 다양하다. 방송이 된 후 '전쟁이 나거나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아이템'이면 그 소재가 된다. 하지만 소재를 멀리서 찾지는 않는다. 우주에서 얻은 소재로는 시청자들을 끌어당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소재는 우리 생활 주변에 널려 있다. 그 옥석을 가려 재미나게 꾸미는 것이 바로 김병욱 PD와 작가들이 할 몫.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여섯 명의 작가가 돌아가면서 쓴 대본을 매만지고, 목요일에는 다음주에 방송될 아이템을 정하고, 금요일에는 개별 장면을 위한 시놉시스를 만든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녹화가 이루어진다. 김PD는 이 모든 〈순풍 산부인과〉의 출산과정에 빠짐없이 참가한다.

"물론 연기자는 다른 스케줄이 없다면 쉴 수 있겠죠. 하지만 저를 비롯한 작가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대본회의를 합니다. 한마디로 쉴 시간이 없다는 뜻이지요. 엄살처럼 들리겠지만 지금까지 단 하루도 제대로 쉰 적이 없어요."

〈순풍 산부인과〉이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오후 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대본회의를 통해 이뤄지는 완벽한 준비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대본회의를 통해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녹화 때도 연기자의 애드리브나 즉흥적인 연기는 허락되지 않는다. 녹화를 하면서 출연자가 조금이라도 오버연기를 할라치면 여지없이 'NG'가 떨어진다. 대사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연기도 마찬가지다. 스튜디오의 동선에 따라 대사의 시작됨과 잠깐 쉼, 그리고 되받아치는 자리가 정해져 있을 정도다. 웬만한 드라마보다 빈틈이 없는 제작 시스템이다. 그렇기에 엎치락뒤치락거리면서 단순히 시청자를 웃기는 일에만 몰두하는 다른 시트콤과는 다른 '단단한 웃음'이 〈순풍 산부인과〉의 장점이다.

사실 김PD는 지난 12월로 〈순풍 산부인과〉의 닻을 내릴 작정이었다. 이유는 '명예로운 퇴장'을 위해서였다. 시청률도 좋고, 작품에 대한 반응도 대단하지만 그럴수록 '막을 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니고 있었다.

"외주제작이기 때문에 한 편이 늘어날 때마다 돈입니다. 하지만 프로듀서의 욕심으로는 지금 막을 내리고 싶어요. 나중에 소재빈곤이나 매너리즘에 빠져 이른바 '프로그램이 노망'이 들어 추한 모습으로 쓸쓸히 사라지는 게 싫었거든요. 저나 〈순풍 산부인과〉 그리고 출연자 모두 명예로운 퇴진을 바랐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방영이 내년 말까지로 연장됐습니다."

★ 폐단도 따르는 스타 시스템 포기, 무명이라도 출연하면 스타가 된다.

방송가에서 '시트콤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김PD가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80학번으로 외국어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MBC에 입사를 했다. 처음에는 라디오 쪽에서 일을 했다. 1991년 SBS 개국과 함께 자리를 옮기면서 라디오에서 TV 연출 쪽으로 방향선회를 했다.

"예능국 프로듀서로 활동했죠. 조연출 딱지를 떼고 첫번째로 연출한 프로그램이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TV전파왕국〉, 옴니버스 코미디프로인 〈천일야화〉 등을 연출했는데 별로 빛을 못 봤어요. 그리고 주병대 선배와 함께 연출한 〈LA아리랑〉을 통해 시트콤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고향 선배인 주병대 PD로부터 욕도 많이 들었어요."

10개월 간 〈LA아리랑〉의 연출을 끝낸 지난 1996년 말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NBC의 인기시트콤 〈홈 임프루브먼트〉 제작현장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당시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대여섯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또 애드리브나 대사 NG가 허용되지 않는 완벽한 제작, 그리고 대본회의를 통한 완벽한 대본 등 그 때 보고 배운 것을 〈순풍 산부인과〉에 그대로 적용했다. 물론 처음에는 국내 제작 여건상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연수기간 동안 배운 것 중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캐릭터'였다. 그의 지론 중 하나는 '이제는 캐릭터다'라는 것이다. 출연자의 캐릭터만 제대로 설정하고 발전시키면 과장된 연기나 어설픈 대사 없이도 진실한 웃음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연기자의 기교나 재간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손쉬운 제작방식은 한계가 있어요. 시트콤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주인공 한 명, 한 명의 '캐릭터'입니다. '캐릭터'로 승부가 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순풍 산부인과〉에는 주연, 조연이 따로 없다. 이것은 바로 출연진 한 명 한 명에게 독특한 캐릭터의 생명력을 불어넣었기에 가능한 일. 안하무인 성격에 폭군으로 행세하는 오지명, 작은 이익에 목숨을 거는 학원강사 영규, 완력을 쓰는 미달이, 너무 착해 항상 피해만 보는 방송작가 오중 등 친근하지만 독창적인 캐릭터를 지니고 있다.

〈순풍 산부인과〉의 장점 중 하나는 장점만큼이나 폐단이 많은 '스타 시스템'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 오지명, 선우용녀, 박영규, 박미선, 이태란, 송혜교, 권오중, 이창훈, 표인봉, 장정희 등 출연진들을 살펴보면 '스타 시스템'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잘 말해준다. 대부분 출연자들이 이 드라마에 출연한 이후, 과거의 명성을 회복했거나 새로운 팬층을 확보했다.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명의 배우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런 인기를 반영하듯 〈순풍 산부인과〉의 인물설정과 상황을 빗댄 CF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순풍 산부인과〉 인기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미달이의 CF 개런티는 웬만한 성인 연예인이 받는 개런티보다 많은 2천만원 수준.

지난해 〈순풍 산부인과〉의 NG 장면이 다른 오락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제작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동선이나 대사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드라마 촬영장보다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웃긴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출연진들의 웃음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난다. 특히 오지명씨의 경우엔 대본을 보다가 웃으면 촬영을 하면서도 웃어 NG가 나는 징크스가 있다고 한다.

〈순풍 산부인과〉를 통해 국내에 시트콤의 가능성을 연 김병욱 프로듀서. 그에게 '왜, 하필이면 산부인과를 배경으로 했느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웃기는 이야기인데요. 반드시 산부인과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어요. '산부인과' 하면 아이도 낳고 조금은 야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면 시청자들이 많이 볼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걸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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