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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쓰는 감시원도 OK, 평양서 인터넷 사용도 OK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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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향산군의 한 유치원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세계식량계획(WFP)의 원조 식량으로 만든 밥을 먹고 있다. 2006년 12월 촬영. [향산(평안북도) AP=연합뉴스]

“식량 지원을 끊어도 좋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모니터링(분배 감시) 요원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국제사회의 지원에 의존해 식량난을 견뎌 온 북한이 완강하게 고집해 온 마지노선이다. 실례가 있다. 2009년 3월 북한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 혈통의 모니터링 요원’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미국이 약속한 50만t 가운데 이미 전달된 17만t을 뺀 나머지 33만t 지원은 없던 얘기가 됐다. 당시 이 과정을 지켜본 정부의 대북업무 관계자는 “북한은 모니터링 문제를 체제 안전과 결부시켜 인식하는 것 같았다”며 “모니터링 요원으로 위장한 스파이를 들여보내 북한 사회 곳곳을 들여다보려 한다는 의구심이 강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세계식량계획(WFP)과의 협의에서 모니터링 강화를 위한 요구조건들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WFP가 본지와 인터뷰에서 “북한과 합의했다”고 밝힌 모니터링 계획에 따르면 북한은 국적과 상관없이 한국어 구사자의 활동을 받아들였다. 모니터링 요원의 수도 종전 12명에서 59명으로 늘어난다. 정부 관계자는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한국어 구사자로 구성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뿐만 아니라 평양을 포함한 6개 지역 사무소에서 자유로운 인터넷 연결도 보장했다. 또 전엔 가정 방문을 포함한 현장조사를 하려면 일주일 전 방문 대상지를 통보해야 했는데 앞으로는 24시간 전 통보로 완화됐다. 한 달에 400여 곳을 방문, 식량 지원을 현장 확인하기로 합의했다. 이 가운데는 자강도·양강도 등 군사적 이유로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던 지역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방문 대상 지역에 식량이 도착하는 항구와 창고는 물론 시장이 포함된 것도 새로운 변화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3월 식량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방북한 WFP 조사단에 평양 통일시장과 각 지방의 농민시장 방문을 허용했다. 이런 시장은 여태까지 북한이 외국인의 방문을 극도로 통제해 오던 곳이다. 프랜시스 케네디 WFP 대변인은 “이번에 북한과 합의한 내용은 지난 15년 동안 시행해 온 분배 감시 중 가장 강화된 수준”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식량 지원 재개를 반드시 성사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식량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평양을 방문하는 외국 외교관에겐 상대국의 경제사정을 가리지 않고 어김없이 손을 내밀었다. 미국에는 비공식 채널인 뉴욕채널을 통해 쌀 지원을 요청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모든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해외에서 식량 80만t을 입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첩보도 돌았다. WFP와 식량농업기구(FAO)가 지난해 10월에 이어 올 3월 추가 식량 조사를 하게 된 것도 북한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북한이 이토록 식량 지원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의 식량난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해진 탓일까. WFP가 3월 하순 발표한 ‘북한 식량사정 긴급조사 보고’에 따르면 2011년 양곡연도(2010년 11월~2011년 10월)의 곡물 생산은 425만t으로 수요량 534만t보다 100만여t 부족하다. 지난해 쌀 작황은 예년과 큰 차이가 없지만 올봄과 여름에 걷어야 할 보리와 밀, 감자 같은 작물이 지난겨울 66년 만의 혹한으로 큰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이들 여름 작물이 북한 곡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다. 강원도 지역의 씨감자는 70%가 얼어서 상했다. 이런 분석을 근거로 WFP는 32만t 지원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WFP 통계의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시각도 있다. 특히 대북 압박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강하다. 이유는 WFP 통계가 북한이 제출한 보고서를 기초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지원을 확보하려고 수확량을 축소 신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식량 확보에 집착하는 것은 강성대국 진입의 해로 선포한 2012년을 앞두고 식량 비축을 위해 의도적으로 식량난을 과장하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북한 도정률·손실률 못 믿겠다”
일례로 WFP 보고서에는 도정률(쌀을 깎아내는 비율) 65%로 나와 있는데 이는 너무 낮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의 2010년 도정률은 69%다. 만성 식량난에 허덕이면서도 쌀이 남아도는 한국보다 더 많이 깎아낸다는 게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추수 과정과 그 이후에 15%가 손실된다는 것도 부풀려진 것이란 의혹을 받는다. 하지만 권태진 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은 “경작 관리를 충실히 하고 농업 기술이 발달한 지역일수록 알곡이 튼실해 도정률이 높아지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일수록 쭉정이가 많아 도정률이 낮은 게 정상”이라며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터무니없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WFP 통계의 정확성은 간단하게 검증하기 힘들다. 하지만 통계의 진실과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인도주의 명분 아래 이뤄지는 국제사회의 식량 지원이 정치적 효과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치적 목적에 식량 지원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식량 지원을 매개로 미국과의 대화를 재개하고 국제사회의 압박을 풀어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식량 지원을 징검다리로 삼아 중단된 6자회담 재개로 이어가려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대화 무드를 연출하기 위해 식량 지원이 활용된 전례들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대북 식량 지원 검토에 착수했고 조만간 현지조사단을 파견할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서울에 오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 의제 중에서도 식량 지원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질 것이라는 게 정부의 관측이다. 보즈워스 대표는 지난 1월 미 의회에서 “식량 지원의 필요성을 검토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외교 소식통은 “WFP가 발표한 32만t 지원계획도 전례에 비춰 볼 때 가장 큰손인 미국의 지원 재개를 전제로 수립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겉으론 WFP가 지원 주체지만 진짜 물주는 미국이 되는 형식이다.

식량 지원이 대화 재개로 이어지는 패턴은 대북 협상 과정에서 곧잘 드러났지만 이번엔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예단하기 힘들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밝혔듯 미국의 식량 지원은 한국과의 긴밀한 공조하에 검토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천안함·연평도 도발에 대한 북한의 입장 표명을 대화 재개 조건으로 내건 한국은 미국보다 식량 재개에 훨씬 소극적이다.

예영준·전수진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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