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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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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기택
시인

오랜만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니는 조카들이 와서 한참 놀고 떠들고 갔다. 그 애들이 들려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틀니를 뺐다 끼웠다 하는 할머니를 어린 손자가 한참 재미있게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할머니, 눈알도 한번 그렇게 해 봐.”

 순식간에 답답한 게 빵 터지면서 어리둥절해졌다. 이가 다 빠져 틀니를 쓰는 게 얼마나 괴롭고 불편할까, 늙어서 온몸이 삐걱거리면 얼마나 속이 상할까 하는 생각은 어른들의 것이다. 이를 통째로 뺐다가 다시 끼우는 일은 아이에게는 아주 신기한 마술이다. 아이는 제 몸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변신하는 마징가제트처럼 할머니가 위대해 보였을지 모른다.

 한국전쟁 때 굶주린 아이가 제 부모에게 ‘환한 밥’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이어령의 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쌀밥이라는 말을 몰라서 그랬다지만 ‘환한 밥’이라는 표현은 생각할수록 놀랍다. 그 말에는 흰밥이라는 의미에 더해 밝은 색이 자극하는 황홀한 식욕, 한 입 먹으면 어둡고 칙칙한 마음까지 환해질 것 같은 심리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각과 정서가 꿰맨 자국 없이 잘 결합된 아름다운 시어를 보는 것 같다. 내 딸아이도 서너 살쯤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엄마, 우유 구워 줘.” ‘데우다’는 말을 모르는데도 문장은 오히려 더 생기가 돈다.

 어른들의 말은 경험과 학습에 의해 굳어진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린이의 말은 언어 관습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열려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이야기하는 대상도 사람에 그치지 않고 세상 모든 것에 열려 있다.

 최근에 개를 무척 좋아하는 아이를 둔 엄마의 푸념을 들었다. 개가 두 마리나 있어 골칫거리인데 아이가 떼를 써서 한 마리가 더 늘었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개에 대해 듣기 싫은 소리를 막 해댔더니 아이가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 제발 말소리 좀 낮춰. 개가 다 알아듣는단 말이야. 개가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인형이나 장난감은 물론이고 동물·나무·풀·꽃·돌과도 대화를 하며 노는 것이 어린이의 특성이다.

 사전에 없는 말을 제멋대로 만들어 쓰고 사물과 자연을 의인화하는 일은 시에서도 흔하다. 시는 사람만을 위한 배타적인 말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과 소통하는 자유로운 말을 쓰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의 언어는 어린이의 말을 닮았다. 어린이는 선천적인 시인이다. 이런 귀중한 재능은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잃게 된다. 게다가 요즘은 어린 시절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세상이니 그럴 수밖에.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잃어버린 어떤 귀중한 가치를 어린이가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어린이는 문명과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관습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어린이의 상상력은 어른에게는 부족한 것이며 배울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