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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전 사람 이솝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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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29면

우리는 시속 140m인 거북이가 최대시속 72㎞인 토끼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이솝은 우리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진은 이솝상(1~5세기 작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10월 27일 평양 탈환 환영 시민대회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의 원전은 이솝 우화다. “뭉치면 서고, 흩어지면 넘어진다(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라는 격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 또한 이솝 우화인 ‘북풍과 해’와 밀접하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라는 우화다.
우리 정치사의 중요 대목에까지 이솝(기원전 620년께~564년께) 우화(寓話)가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양치기 소년,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시골쥐와 서울쥐, 신포도처럼 제목만 들어도 내용이 연상되는 이솝 우화가 생활 속 깊숙이 침투한 것도 한 가지 배경이 된다. 우화의 역사를 보면 우화는 애초에 정치와 밀접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우화는 정치 담론에 사용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웅변가들은 주장을 펼 때 우화를 적절히 활용했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20> 이솝 『우화』

노예 출신의 못생긴 현인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시 언어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이던 우화를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수사학에서 우화가 사례를 들어 주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소개하면서 이솝을 언급했다. 플라톤(기원전 428/427~348/347)도 이솝을 언급했다. 그의 파이돈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이솝 우화를 운문으로 바꾸며 처형을 기다렸다. 소크라테스는 직접 우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제우스는 ‘쾌락’과 ‘고통’이 끊임 없이 싸우는 게 못마땅했다. 제우스는 둘의 머리를 한데 묶어 버렸다. 그때부터 쾌락에는 항상 고통이 따르게 됐다. 이솝을 언급한 인물로는 문학비평가·문법학자인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257께~180)가 추가된다.

이솝 『우화』의 영문판(펭귄 클래식스·1998) 표지

이솝에 대한 이런 언급은 그가 실존 인물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그러나 이솝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사모스, 프리지아 등 여러 설이 있다. 중세에는 이솝이 에티오피아 흑인이었다는 설도 유포됐다. 이솝을 둘러싼 신화와 역사를 분리하는 것도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솝 우화에는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우화도 많이 섞여 있다. 그리스에는 없고 북아프리카에나 있는 낙타·원숭이·코끼리가 이솝 우화에 자주 나오는 것도 이솝 우화가 여러 집단의 공동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이솝도 추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지혜가 더 빛을 발한다는 가치관을 그들이 대표한다. 이솝은 머리가 크고, 목이 짧고, 배가 나온 데다 등이 굽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말도 하지 못했으나 이시스 여신을 모시는 여성 사제에게 친절을 베풀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이솝은 노예였다. 기원전 5세기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기원전 484께~430)는 이솝이 기원전 6세기에 살던 노예라고 기록했다. 노예였을 때 비서로 일했던 이솝을 그의 두 번째 주인이 해방시켰다. 자유인이 된 이솝은 왕들과 도시국가의 자문으로 활약한다. 영웅전으로 유명한 기원 후 1세기 전기작가 플루타르코스(46께~119 이후)에 따르면 이솝은 기원전 6세기 엄청난 부(富)로 유명한 리디아 국왕 크로이소스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이솝은 델포이 시민들에게 금을 전달하다 죽임을 당한다. 델포이는 아테네 북부에 있는 아름다운 산악지역으로 아폴로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우화에서는 말하는 동식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서 풍자와 교훈을 알려준다. 우화는 기원전 3000년 수메르나 기원전 2000년 이집트에도 있었다. 그리스에서도 문헌상 최초의 우화를 만든 사람은 이솝보다 3세기 전인 기원전 700년께 활동한 헤시오도스다. 그러나 오늘날 우화의 대명사는 이솝이다. 풍요의 시대로 정의되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1837~1901)부터 영어로 활발하게 번역 출간된 이솝 우화는 영어에도 많은 표현을 남겼다. The lion’s share(제일 좋은 몫, 알짜), King Log(무능한 왕), King Stork(폭군), cry wolf(거짓 경보를 울리다), sour grapes(지기 싫어함, 오기)와 같은 표현이다.

철저한 현실주의 세계의 원리 담겨
현대인은 중세·근대에 살던 사람들보다 고대에 대해 더 많이 안다. 이솝 우화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고대 생활상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이솝 우화에 나오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다. 긴털족제비나 흰족제비가 맞다. 일반 그리스 가정에서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 시대 이후이기 때문이다.

포도를 따지 못한 여우가 ‘포도가 시다’며 오기를 부리며 떠났다는 이솝 우화에서 유래한 신포도(sour grapes)에는 다른 뜻이 담겼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리스어 원문을 검토하면 신포도보다는 ‘익지 않은(unripe) 포도’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익지 않은 포도’가 성적으로 미숙한 여자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점잖은 시대였다. 이솝 우화의 원전에는 대변·소변이나 섹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심한 첨삭 과정을 거치며 그런 이야기들은 빠졌다. 특히 이솝 우화가 어린이에게 어른의 세계를 교육하는 교재로 사용되면서 이솝 우화는 원전에서 더욱 멀어졌다. 빠진 이야기로는 하이에나에 대한 것이 있다. 하이에나는 수컷과 암컷의 성(性)이 매년 번갈아 바뀐다는 고대 신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다. 수컷 하이에나가 암컷에게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짓을 하려고 하자 암컷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게 하려는 짓을 곧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솝 우화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경우도 있었다. 케임브리지대 동물학자인 크리스토퍼 버드가 2009년 행한 실험에 따르면 떼까마귀는 병 속에 돌을 넣어 수위를 높인 후 물에 담긴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다. 목마른 까마귀가 조약돌을 물병에 집어 넣어 물을 마시는 이솝 우화의 ‘까마귀와 물병’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게 밝혀진 것이다.

프랜시스 발로(1626?~1704)가 출간한 이솝 우화(1666)에는 ‘까마귀와 물병’ 이야기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발명’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버드대 도널드 그리핀(1915~2003) 교수는 동물의 마음(Animal Minds)(1992)을 비롯한 저서에서 동물에게도 의식과 동기가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 우리는 이솝 우화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원래는 어른을 위한 이솝 우화를 어른들이 막상 되찾아 갈지는 의문이다. 그들이 이솝 우화에서 발견할 것은 동심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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