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기적은 결코 요란하지 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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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 주말 논설위원실 식구들과 함께 포스코 광양제철소를 둘러볼 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론 25년 전쯤 포항제철소를 견학해본 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제철소가 겉으론 별다른 움직임 없이 차분하고 조용해 보이는 가운데 안으로는 쉼 없이 돌아가며 어마어마한 규모로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 자못 놀라웠다. ‘정중동(靜中動)’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 놀라운 것은 정작 결코 요란하지 않다.

 # 그날 광양에서 일행과 헤어져 광주광역시로 가서 일을 본 후 서울로 올라오려고 KTX 막차를 탄 지 채 몇 분이 안 지나 나는 ‘아뿔사’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전 식당에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그대로 꽂아둔 채 열차를 탄 것이었다. 여객전무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다음 정차할 역은 정읍이고 거기선 광주 송정역으로 가는 막차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광주역으로 돌아갈 방법도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여승무원이 다가와 광주역에 연락해 역전식당에서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찾아 광주에서 서울 용산으로 오는 무궁화호 막차에 실어 보내면 내일 아침에 용산역에서 되찾을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음날 나는 용산역에서 기적같이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밤늦게 역전 식당까지 나가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찾아 열차편으로 보내준 이름 모를 광주역 직원과 소리 없이 중간에서 연락하며 수고한 KTX 여승무원 구정혜씨 덕분이었다.

 # 휴대전화를 찾으러 용산역으로 나간 김에 중앙선 전철을 타고 양평과 용문 사이의 원덕역에서 내려 해발 583m의 나지막한 추읍산을 올랐다. 일요일 오후였지만 정상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적막했다. 혼자 주읍리라는 곳으로 내려오는데 점심을 거른 탓에 무척 배가 고팠다. 근처엔 식당도 없었다. 다만 마을에 ‘산수유 사랑방’이란 팻말이 걸린 집이 눈에 띄었다. 대문간엔 마음껏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해놨지만 정작 사람은 없었다. 그저 준비된 산수유차를 마시고 1000원짜리 한 장을 절구통에 넣도록 해놨을 뿐이었다. 그 집 마당에 들어서자 물레방아 옆에 작은 요강이 하나 놓여 있었고 거기 꽃을 심어 놓았다. “요강에 꽃이라…” 하며 혼자 되뇌고 있을 때 누군가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기에 식사도 되느냐고 묻자 밥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 아주머니는 김치와 밥은 드릴 수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되물어 왔다. 나는 “당연하고 감사하죠”라고 넉살 좋게 답했다. 아주머니는 마침 동리사람들하고 나눠 먹으려 쑨 닭죽도 있는데 드시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재차 감사하다고 답했다. 결국 그 집에서 닭죽에 산수유차까지 대접받은 나는 고마운 마음에 사례를 했지만 그 아주머니는 끝내 받지 않으셨다.

 # 이은숙이라는 이름의 올해 56세 난 그 아주머니는 여덟 살 더 많은 남편이 직장암이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도 직장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자 자기 남편은 이곳에서 무공해로 직접 기른 것만으로 식사해 암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채소는 물론 닭도 직접 기른 것이라고 했다. 퇴비마저 항생제가 그 안에 담겨 있을까 의심스러워 산에서 낙엽이 썩은 것들을 모아다 쓴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고즈넉한 그녀의 생활 자체가 무공해였다. 그녀는 남편과 맘이 맞아 이렇게 살아도 불편한 것 없이 즐겁다고 했다. 그녀의 삶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다. 들어오는 대문 옆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조청 끓는 소리가 되려 크게 들릴 정도였다. 놀라운 것이 결코 요란하지 않음을 광양제철소에서 느꼈듯이, 고마운 도움의 손길은 소리 없이 펼쳐짐을 광주발 KTX에서 경험했듯이, 양평 추읍산 아래서도 느낀 것은 정녕 고요한 것은 이미 놀라운 기적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 아주머니에게서 얻어먹은 한 끼 식사는 암도 고칠 만큼 놀라운 식탁이었지만 정녕 소리내지도 자랑하지도 않는 고요한 기적의 식탁이었던 것이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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