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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흑인 할렘가의 한인 '슈바이처'

미주중앙

입력

"명의는 따로없어요. 환자 마음의 문 먼저 열줄 알면 그게 진짜 의사지."

플로리다 잭슨빌 주민들 사이에서 정상호 박사(사진)는 '살아있는 슈바이처'로 통한다.

36년전, 모든 의사들이 꺼려하는 다운타운 흑인촌에 '닥터 정 클리닉'을 개업한 그는 지난달 31일 은퇴와 함께 정들었던 병원 문을 닫았다. 올해로 일흔넷.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빈민가 흑인들과 함께 하면서 정 박사는 '마음의 부자'가 됐다.

병원이 있는 곳은 마약거래가 성행하고 일주일에 두서너명씩 총을 맞아 죽어나가는 이른바 '잭슨빌의 할렘'이다. 그는 "이 곳에서 36년을 지내면서도 아무탈 없이 의사생활을 마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의술 배우러 온 유학생이 '흑인촌의 슈바이처' 되다

고대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서 10년간 의사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발전된 의학기술을 공부하고 싶어 1973년 플로리다로 유학을 왔다. 당시 잭슨빌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레지던트로 있던 그는 우연히 한 흑인으로부터 "우리 동네에 의사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흑백갈등이 심했던 당시, 백인의사에게 진료받기가 쉽지 않아 치료를 받지 못하는 흑인들이 많았다.

"그땐 병원에 화장실이 2개가 있었어요. 백인과 흑인이 이용하는 화장실이 달랐고, 버스를 타도 백인이 오면 무조건 일어나 양보를 해야하기 때문에 흑인들은 텅빈 버스를 타도 뒤에 서있어야 했죠."

정 박사의 클리닉은 잭슨빌 할렘의 병원 '1호'가 됐고, 이 곳은 지금도 이 지역의 유일한 병원이다.

작고 초라했지만 몰려드는 환자들로 병원은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하루 60명까지 환자가 들이닥칠 때는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병원이 하나뿐이니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가족 4대가 이 병원을 이용했어요. 피도 뽑고, 애도 받고, 깁스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다했죠."

넉넉치 않은 형편에 비싼 병원비를 지불할 수 없는 환자들은 "고맙다"며 집에서 수확한 고구마며, 과일, 호두를 정 박사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부족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들 도울 수 있어 기뻤다"

그의 은퇴소식에 가장 섭섭해 했던 사람들은 동네 주민들이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지막 진료를 알리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어떻게들 알았는지 전화를 해서 왜 문을 닫았냐고, 자기 동네 다시 오지 않을 거냐고 물어요. 인정 많은 게 꼭 한국 시골사람들 같아요."

정 박사는 은퇴를 하면서 정리하고 버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아기가 젖을 떼는 기분이에요. 가슴에서 떠나는 마음. 그래도 부족한 내가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 입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돈과 명예 때문에 의사를 꿈꾸거나 자녀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꼬집으며, "소명없는 의사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의사가 되기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요. 요즘은 미케닉 같은 의사가 너무 많아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진단하고 있어요."

환자의 마음을 열고,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는 것이 직업 철학이다.

정 박사는 남은 인생을 양로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봉사할 계획이다. 돈 안받는 진짜 의사의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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