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차 베테랑 경사 “성추행범 눈빛만 봐도 알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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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1일 오전 8시30분 서울지하철 2호선 잠실역 승강장. 서울 지하철경찰대 수사2대 소속 손모 경사는 혼잡한 인파 사이에 있는 한 남성을 주시했다. 양복 차림의 이 남성은 한동안 승강장을 서성이며 전동차에 오르지 않았다. 전동차 한 대를 보낸 후 뒤이어 들어온 차에 올랐다. 손 경사는 동료 이모 경장과 함께 문제의 남성을 따라 탄 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10분쯤 흘렀을까. 이 남성은 짧은 반바지를 입은 20대 여성 뒤로 바짝 다가서더니 자신의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여성이 몸을 피하려 하자 곧바로 이 경장이 여성에게 다가가 ‘성추행을 당했다’는 진술을 받았다. 남성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7호선 이수역의 지하철경찰대 사무실로 옮겨 조사가 시작되자 남성은 “신분증이 없다”며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엔 서울고등법원 황○○ 판사라고 새겨져 있었다. “처음엔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법 앞에 지위고하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사를 진행했고, 자백도 받아냈습니다.”

 올해 21년차 베테랑 형사인 손 경사는 10여 년을 지하철경찰대에서 보냈다. 그는 “오랫동안 지하철 범죄를 다루다보니 성추행범·소매치기범은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지하철경찰대는 수사1대와 2대로 구성돼 있고, 종로·사당·서울역 등 주요 역에 출장소를 두고 있다. 모두 100여 명의 경관이 일하고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출근 시간대인 오전 7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퇴근 시간대인 오후 5시30분부터 8시30분까지 지하철역 승강장 주변에 투입돼 각종 범죄를 단속하고 있다. 손 경사가 소속된 수사2대의 경우 출·퇴근 시간에 20여 명의 사복경찰관들을 한강 이남 지역의 주요 전철역에 배치한다. 신도림·사당·교대·잠실 등의 대규모 환승역이 주된 활동 무대다. 지하철경찰대 경찰관들은 오전 7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6시간 근무를 한 뒤 하루 쉬는 식의 패턴으로 일한다. 그러다 보니 개인 시간을 갖기도 힘들다.

 지난 몇 년 사이 이들의 주 임무는 성추행범 검거다. 소매치기의 경우 2009년 469건, 지난해 416건으로 줄어들었지만 성추행은 671건에서 1192건으로 급증했다. 과거엔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의 고소로 수사가 시작됐지만 요즘엔 경관들이 직접 현장을 목격해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하철경찰대는 성추행을 당하는 피해자를 발견하면 주로 휴대전화로 ‘성추행을 당하고 있습니까’란 문자메시지를 보여준다. 피해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움을 요청하면 가해자 검거에 나선다.

 손 경사와 이 경장은 한 조를 이뤄 1년 6개월간 함께 일했다. 눈빛만 봐도 알 정도로 호흡이 척척이다. 황 판사를 검거한 21일엔 또 다른 성추행 혐의자 3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이 경장은 “멀쩡한 회사원부터 자영업자, 심지어 종교인들도 성추행범으로 잡혀온다”고 말했다. 그는 “지하철 범죄자 검거율을 더욱 높여 시민들에게 ‘경찰이 항상 출퇴근 지하철을 지켜보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글=강신후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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