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⑥ 관치금융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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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1980년대 초반까지 모든 금융회사의 예금·대출 금리는 대한금융단 협정으로 정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 종목별 최고 금리가 거의 그대로 채택됐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한국은행이 시장금리를 직접 규제했다. 사진은 1971년 한국은행 김성환 총재 주재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모습.


요즘에도 ‘관치금융’이란 말이 종종 나온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은행들이 정부의 관리와 간섭 아래 있지 않았던 시기가 드물다. 식민지 유산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은행의 태생적 한계인지 모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제강점기의 은행들은 모두 정부의 귀속자산이 돼 정부 소유로 들어갔다. 당시 은행은 조선은행(나중 한국은행), 식산은행(산업은행), 저축은행(제일은행), 상업·조흥 등 일반은행, 그리고 무진회사(한일은행) 등이 있었다. 초기엔 미 군정이, 그 다음엔 정부가 경영진을 임명하는 ‘국영은행’ 체제였다.

 당시는 은행이 귀했다. 광복과 함께 서울증권거래소가 폐쇄되면서 채권이나 주식 거래 길은 막혀 있었다. 높은 물가상승률과 불안한 사회상황 때문에 주식에 투자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자연히 기업들은 돈을 구하기 위해 은행으로 몰렸다. 정부로서는 이러한 은행을 쥐고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4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지를 두고 정부는 고심했다. 자연히 돈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은행의 증자가 필요했다.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은행을 민간에 팔기로 했다.

 이때 은행을 가져간 건 대기업이었다. 흥업은행은 제일제당의 이병철, 조흥은행은 민덕기, 저축은행은 조선제분의 윤석준, 상업은행은 합동증권의 진영덕씨가 정부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가 나면서 세상이 다시 뒤집어졌다. 정부가 일반은행 주식을 도로 환수해 갔다. 은행 소유권은 다시 정부로 넘어갔다.

 60년대 들어 정부는 적극적인 경제개발 정책을 세웠다. 이를 지원하는 역할을 은행이 담당했다. 정부가 필요로 하는 산업을 키우기 위해, 정부는 금융규제를 크게 강화했다.

 이에 따라 예금은 금융단이 공동으로 설정하거나 폐기했다. 은행마다 특색 있는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금리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최고금리를 정하면 금융단이 세부적인 실행이자를 결정했다. 다른 수수료도 마찬가지였다. 인사, 급여, 점포 설치, 증자 등 내부 경영사항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일일이 관여했다.

 대출은 한국은행이 정한 ‘금융기관 자금운용에 관한 준칙’에 따라 은행이 지침을 마련해서 실시했다. 정책자금을 제외하고는 부문별로 융자 우선순위와 한도를 정해서 그에 따라 하게 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나오면서 은행은 산업화에 총동원됐다. 그러다 보니 은행 자본금 대비 대출한도를 자꾸만 늘려나갔다. 외자 차입을 위한 보증도 정부에서 은행의 역할로 넘어왔다.

 상품도 똑같고, 금리도 똑같으니 은행 간 경쟁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 은행은 담배가게나 마찬가지였다. 제품도 안 만들고, 값(금리)을 얼마 받으라고 정해주면 팔기만 하면 됐다. 담배가게와 다를 바 없었다.

 기업들은 항상 자금이 모자랐다. 자금 초과수요가 있다 보니 서로 대출을 받으려고 뒤로 리베이트를 주는가 하면 ‘꺾기’도 성행했다. 겉으로 보이는 금리는 똑같은데, 그런 식으로 실제 금리가 뒤에서 형성되곤 했다.

 언젠가 외국 금융인으로부터 “한국의 은행들은 정부 간섭으로 자율적 경영이 없다는데 어떻게 굴러가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융감독기관의 규정과 지점장들이 임원 되려고 하는 경쟁, 이 두 가지 바퀴 위에서 은행은 굴러간다.”

 실제 그랬다. 모든 게 감독기관의 규정에 매여 있었다. 지점장들은 자신이 승진하려는 욕심에 실적 올리기에 몰두했다. 물가가 계속 올랐기 때문에 대출자가 돈을 제대로 안 갚아도 담보를 팔면 문제될 게 없었다.

좌판만 깔면 돈 벌 수 있는 산업이 은행이었다. 은행장들이 권력 입김에 따라 흔들려도 은행은 어떻게든 굴러갔다. 그래서 담배가게식 경영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늘 “사회적인 역할을 하지 않고 돈 장사만 한다면 은행과 전당포가 다를 게 뭐냐”고 직원들에게 얘기했다. 은행엔 심사권을 통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 은행은 그렇지 못했다. 시장은 철저히 통제됐고, 사실상 제대로 된 경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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