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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④ 금융인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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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한국개발금융 초대 사장을 지낸 김진형 전 한국은행 총재는 ‘금융계의 신사’로 불렸다. 사진은 1970년대 후반께 김봉은(왼쪽) 한국개발금융 사장, 윌리엄 다이아몬드(가운데) 국제금융공사 국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김진형 한국개발금융 회장(직책은 당시 기준).


지금의 윤병철이 있을 수 있었던 건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한 분을 꼽으라면 고 김진형 한국개발금융 회장을 들 수 있다. 그분은 나에게 금융인의 길이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스승이다.

 김진형(1905~1987) 회장과의 인연이 시작된 건 1966년이었다. 세계은행의 지원으로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한국개발금융을 설립할 때 한국은행 총재 출신인 김 회장이 개발금융설립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현장 업무를 진두지휘했다. 경제인협회 조사역으로 일하던 나는 그 아래서 실무를 보좌했다. 이후 1967년 한국개발금융이 설립되면서 김 회장은 초대 사장을, 나는 총무부장을 맡게 됐다.

 환갑이 넘은 연세에 김진형 사장이 취임하던 날, 취임사에서 남긴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새롭게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두렵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금융이 정말 자율적으로 커나가는 하나의 모델을 만들기 위한 봉사로 생각하고 전심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작은 회사이다 보니 나는 비서실장 역할을 겸하면서 김 사장을 가까이서 모셨다. 김 사장은 연배가 아버지뻘인데도 참 소탈하셨다. 한 번은 내가 차 문을 열어드리려고 하니 내 손을 탁 쳤다. 문을 열지 말라는 뜻이었다. “자기 차 문도 못 열면서 일선에서 무슨 일을 하겠나.”

 함께 차 탈 일이 있을 땐 절대 나를 앞자리에 태우는 법이 없었다.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했다. 또 타임 등 외국 시사지를 읽으며 최신 정보를 습득하려 노력하는 모습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당시 한국개발금융 자본금은 13억5000만원으로 시중은행 법정자본금(5억원)의 배가 넘었다. 하지만 조흥은행 건물 13층에 있던 사무실은 자그마했다. 사장실엔 카펫도 안 깔려 있었다.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분이 사장으로 취임하여 꾸민 집무실은 검소하다 못해 초라했다. 집기는 김 사장이 직접 고른 조그마한 책상과 4인용 응접세트가 고작이었다. 부사장실엔 소파도 없이 책상과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김 사장은 은행 임원들이 이사회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넓은 사무실과 호화스러운 집기를 갖춘 채 일은 하지 않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몹시 혐오했다.

 김 사장은 당시 ‘부장’이란 직책 없이 전부 ‘조사역’으로 통일시키기도 했다. 일종의 ‘팀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그 시절 기업들은 조직의 책임자들이 관리업무만 담당하기 때문에 인력의 낭비요소가 적지 않았다. 이것을 고쳐보려는 김 사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혁신적인 팀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이런 조직이 매우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인사들과 접촉할 때 매번 자신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6개월 뒤에 부장 직책이 도입됐다.

 이사회에 집행부는 대표이사 한 사람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전부 주주인 사외이사들로 채웠다. 선진적인 지배구조를 일찌감치 채택한 것이다. 1967년에 설립한 회사가 요즘 회사에나 있을 법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개발금융이 출범하고 얼마 뒤 김진형 사장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회사에 관심이 많았던 데다 김 사장과는 같은 경북 선산 출신이기도 했다. 김 사장이 그간의 경과에 대해 보고하자 박 대통령이 김학렬 경제수석에게 “금융계 원로가 뜻있는 일을 하는데 적극 지원해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과의 면담 뒤 김 사장과 김 수석이 만났다. 두 사람은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였다. 김 수석이 “선배님, 정부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김 사장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김 수석이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거요. 내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시게.”

 그 시절 기업을 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부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정부 덕을 보려는 생각이 없었다. 민간 자율로 해야 한다는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 한국개발금융은 돈을 많이 버는 회사였다. 하지만 배당은 항상 정기예금 수준이었다. 어느 날 주주들이 참다 못해 한마디 했다.

 “배당금을 제대로 주든지 아니면 차라리 그 돈으로 직원들 월급이나 많이 주세요.”

 그 말에 김 사장은 “회사가 기강 없이 방만하게 운영돼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독립적·자주적으로 운영하려면 스스로 통제하는 자율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그의 경영철학이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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