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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71) 세계 각국의 폭력조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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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강호(江湖)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 영화 ‘영웅본색’의 대사다. 극중 주인공 저우룬파(周潤發·주윤발)는 홍콩 폭력조직 ‘삼합회’ 멤버였다. 이 고색창연한 대사처럼 영화 속 폭력세계엔 의리와 낭만이 넘친다. 하지만 실제 조직에 몸담았던 이들은 배신과 야비한 폭력만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증언한다. 각국을 대표하는 폭력조직을 통해 친숙한 듯하지만 낯선 주먹세계의 계보를 살펴보자.

이충형 기자

마피아

1920년대 밀주 제조·밀매로 돈 벌어

코사 노스트라 보스. 폭력조직의 공통적 특징은 유사 가족관계를 맺고 있는 점이다. 마피아는 자신들의 조직을 ‘패밀리’라 부르고, 대부(代父) 등 유사 가족관계를 조직원 간에 맺는다. [중앙포토]



마피아(Mafia)는 ‘아름다움’이나 ‘자랑’을 뜻하는 시칠리아 말로 사라센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19세기 시칠리아는 부재지주들의 대농장을 관리하던 ‘가벨로티’란 마름들이 소작농들을 착취해 부를 쌓고 폭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장악했다. 이들이 마피아의 기원이다.

1920년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수천 명을 재판 없이 투옥·고문하며 마피아의 씨를 말리려 했다. 상당수 조직원들은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고, 이는 마피아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피아는 집권 기독교민주당과 손잡고 선거 때 표를 몰아주는 대신 특혜를 얻었다. 건설 붐을 타고 건축허가를 독점했고, 일부는 공직에 진출했다. 60년대엔 이란·아프가니스탄에서 마약을 제조해 미국으로 밀수출해 뉴욕 마약시장의 80%를 장악했다.

92년 보셀리노의 자동차 사고 현장. 마피아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 100만여 명의 시칠리아 주민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우리의 것’이란 뜻)’라 불리는 미국 마피아를 형성했다. 코사 노스트라는 금주령(1920~33) 시기 밀주 제조와 밀매로 두각을 나타냈다. 시카고의 알 카포네는 밀주업 등으로 1927년 한 해 1억 달러를 벌어 기네스북에 올랐다. 뉴욕의 ‘러키’ 루치아노는 동부의 마피아를 5대 패밀리(감비노·제노비스·콜롬보·보난노·루케스)로 통폐합하고 총보스에 올라 현대 마피아의 기틀을 마련했다. 전성기 때는 미국 내 26개 도시에 코사 노스트라 조직이 있었다.

마피아가 오랜 기간 조직을 유지한 원동력은 ‘오메르타(omerta)’란 묵계 규칙 덕분이었다. 불법행위에 대해 조직원은 물론, 목격자 등 관련자 모두에게 당국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피의자는 거의 항상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뉴욕 마피아의 규율을 보면 이탈리아계 남성만이 정규 조직원 자격이 있다. 동료의 아내와 간통하면 안 된다거나 콧수염을 길러선 안 된다는 규칙도 있다.

이탈리아 마피아는 조반니 팔코네 치안판사의 기소로 87년 두목급 19명에게 종신형을 비롯해 338명에게 유죄 선고가 내려지며 위기를 맞았다. 92년 팔코네와 그의 후임 파올로 보셀리노가 잇따라 암살되자 정부는 군대를 시칠리아로 보내 마피아 소탕전을 벌였다. 2006년에도 보스 중의 보스로 불리던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와 두목급 24명이 체포돼 현재 이탈리아 마피아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미국에선 패밀리 두목들이 오메르타를 깨고 다른 조직 두목이 기소되도록 당국에 협조해 자멸하고 있다. 조직은 뉴욕과 시카고 일대로 위축됐고, 5대 패밀리는 현재 내세울 두목조차 없는 실정이다.

  삼합회

7800만 명 거느린 세계 최대 범죄단체

카드 도박 중인 삼합회 조직원들.

삼합회(三合會)는 세계 최대 규모의 범죄단체다. 2007년 현재 7800만 명으로 인터폴은 추산했다. 삼합회는 청나라 때인 1760년대 만주족의 지배에 반대하던 한 족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를 뿌리로 한다. 청 말 천지회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일부가 삼합회가 됐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멸망하자 목적을 잃은 삼합회는 범죄단체로 변질됐다.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지원해 공산당원에게 고문·테러를 가했던 삼합회는 49년 본토가 공산화되자 홍콩에서 새 둥지를 튼다. 50년대 홍콩 정부가 범죄조직 소탕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화승화(和勝和)·신의안(新義安) 등 삼합회 조직들은 뉴욕·런던·암스테르담 등 화교가 많은 외국으로 본격 진출했다. 문화혁명 기간 중 본토에서 홍콩으로 망명한 홍위병 출신으로 구성된 ‘대륜단’도 북미로 진출했다. 이들은 마약·청부살인·돈세탁·도박·매춘 등 전통적 범죄에다 불법 이민 사업으로 거액을 벌어들였다. 최근엔 CD·DVD 등의 불법복제가 주 사업으로 떠올랐다.

삼합회는 야쿠자처럼 상명하복의 수직적 체계는 아니다. 보스의 지시대로 하부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현장 두목에게 실권이 있다. 삼합회에 입문할 땐 자신의 피와 포도주를 섞어 마시고 36가지 서약을 낭독한다. 서약은 주로 동료와의 의리에 관한 내용이다. ‘청바지·셔츠 차림에 굶주리던 시절이 흥할 수 있었던 자산임을 잊지 말라’는 구절도 있다.

현재 홍콩에는 57개 삼합회가 활동 중이다. 신의안은 홍콩 영화계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출신지인 중국 본토로 사업을 확장 중이다.

야쿠자

좌익 학생운동 탄압으로 우익의 특혜 받아

야쿠자 오야붕들. 야쿠자 역시 두목을 ‘아버지(오야붕)’로, 선배를 ‘형님(아니키)’으로 부르는 등 가족적 친밀성을 강조한다. [중앙포토]



화투에서 최악의 패인 ‘8(ヤ·야)-9(ク·쿠)-3(ザ·자)’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많다.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란 뜻에서 점차 폭력배로 의미가 번졌다는 것이다. 야쿠자 자신들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 다이묘(大名·지방 유력자)에게 해고돼 낭인으로 떠돈 사무라이들을 기원으로 삼고 있지만 19세기의 깡패·도박꾼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야쿠자 조직들은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건설 현장이나 하역장 인부들을 회원으로 끌어들여 조직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익 정치인들과 연계해 좌익 세력에 폭력을 행사했다. 군국주의가 무르익던 20세기 전반엔 총리 암살 등 극우 테러에 가담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첩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대가로 30년대 일본이 대륙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토지개발 사업권을 손에 넣었다.

일본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60년 전후 야쿠자 조직원도 2.5배 이상 늘었다. 이들은 폭력으로 좌익 학생운동을 탄압해 우익 정치인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당시 야쿠자는 경찰의 통제력을 넘어서 오히려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조직을 운영했다.

야쿠자 최대 조직은 야마구치구미(山口組)다. 1915년 야마구치 하루요시(山口春吉)가 고베에서 항만 노동자 50명을 모아 시작한 조직은 현재 규슈·홋카이도 등 일본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직원은 3만9000명으로 전체 야쿠자의 40%가 넘는다.

야쿠자는 ‘오야붕-코붕(아비와 아들)’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계급 체제다. 전신의 호랑이 문신과 검은 양복으로 유명하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사과할 땐 새끼손가락을 자른다. 이들은 개인의 해결사 노릇과 마약밀매·도박에서 건설·운수·금융 등 합법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고 스모와 연예사업에도 관여하고 있다.

야쿠자의 연간 전체 수입은 최대 9조 엔(약 12조원)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92년 일명 ‘폭력단 신법’ 제정 후 조직은 약화 일로를 걷고 있다.

  한국의 조폭

70년대 서방파·양은이파·OB파 ‘삼국시대’

한국의 폭력조직은 근대화의 산물이다. 30년대 일제의 토지 수탈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할 일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뒷골목에 발을 들였다. 당시 조폭들은 상인들로부터 갈취한 ‘보호비’가 주 수입원이었다. 명동엔 하야시(한국명 선우영빈)가, 종로에선 ‘구마적’ 고희경, ‘신마적’ 엄동욱, ‘쌍칼’ 김기환이 터를 잡았다. 종로는 34년 일대일 대결로 구마적과 신마적을 무너뜨린 18세 김두한의 손에 넘어갔다.

해방 이후엔 김두한의 ‘민주청년동맹’과 ‘서북청년단’이 좌익 세력에 무자비한 백색 테러를 가했고, 좌익은 정진용이 이끈 ‘조선청년전위대’가 맞섰다.

이정재

조양은

김태촌

칠성파 두목 이강환

50년대는 정치주먹의 시대였다. 동대문 일대를 장악한 이정재는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 결탁해 장충단 집회 방해사건 등을 주도했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정권은 이정재의 숙적이자 친민주당 성향이던 이화룡의 명동파를 ‘충정로 도끼사건’을 빌미로 와해시켰다.

5·16 군사쿠데타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주먹들은 60년대 후반 경제성장 과정에서 다시 등장했다. 이 시기 주먹계를 장악한 이는 이화룡의 행동대장이었던 신상현이다. 특무상사 출신인 그는 ‘신상사파’를 조직해 서울의 노른자위인 명동을 차지했다. 이즈음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호남의 주먹들이 대거 상경해 무교동 일대에서 오종철과 박종석이 ‘범호남파’를 형성했다. 범호남파는 주류 공급권 등을 놓고 갈등을 빚던 신상사파를 75년 사보이호텔 신년회에서 급습했다. 주먹세계에서 처음으로 회칼이 등장했고 습격을 주도한 오종철파 행동대장 조양은이 급부상했다. 범호남파도 분열해 박종석파 행동대장 출신 김태촌과 조양은이 3년간 쫓고 쫓기며 혈투를 벌였다.

70년대 후반부터 주먹계는 김태촌의 ‘서방파’와 조양은의 ‘양은이파’, 역시 광주에서 올라온 이동재의 ‘OB파’가 전국구 주먹시대를 열었다. 부산 칠성파, 대구 동성로파, 대전 옥태파 등 지방 대도시에도 조폭들이 할거했다. 이들은 대형 유흥업소의 운영권을 차지했고 주류 도매, 건축자재 공급 등으로 부를 축적했다. 채권·채무관계에 개입해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신군부가 집권한 80년대엔 호국청년연합·신우회 등 사회·친목단체를 가장해 본색을 숨기기도 했다.

90년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주먹세계는 크게 위축됐다. 이후 조폭들은 축적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건설업 등 합법적인 공간으로 영역을 옮겨갔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기도 했다. 당국은 조폭들이 합법을 위장해 조직을 거대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검찰이 추산한 조폭의 조직원 수는 2009년 말 5450명으로 2001년에 비해 31.2%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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