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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김홍집 제거한 고종 곁엔 친일 매국노만 득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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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호 30면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이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사령관, 오른쪽이 외부대신 박제순이다. [사진가 권태균]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③친일내각의 갈등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12월 13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처단 요구가 드높은 외부대신을 되레 승진시키고 이완용에게 외교권을 준,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박제순은) 오적(五賊) 중에서 글도 있고 교활해서 오랫동안 전 국민의 타매(唾罵:침 뱉고 꾸짖음)를 견뎌왔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 날로 심한 것을 우려해서 지위는 높고 녹봉(祿俸)은 후하지만 일찍부터 밤이 되면 방황했다”고 전한다. 박제순이 방황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조약 체결에 대한 비난이 드높았음을 뜻한다. 1906년 2월 16일에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의 집에 자객이 침입해 자상을 입힌 사건까지 발생했다.

고종의 이중적 정치행보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10년 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전격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해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을 역적으로 규정해 경무청(警務廳) 문 앞에서 군중들에게 참살당하게 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의 아관파천에 대해 “헌정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는데, 이제는 망명할 공사관도 없지만 의병 진영에라도 합류해서 자신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령을 내리면 일본이 보호한다고 해도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군중의 분노는 갑오개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한 상대에게는 일단 굴복했다가 나중에 뒤집기를 시도하는 고종의 성격은 일제가 외교권을 빼앗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통감통치에는 장애요소가 되었다.

1 일진회 회장 이용구(오른쪽)와 송병준. 둘은 흑룡회의 첨병이 돼 매국의 길에 앞장섰다. 2 통감관사. 이토는 외교권뿐만 아니라 내정을 총 간섭하는 사실상의 준총독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일제는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3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그 사이 고종은 1906년 1월 11일 일본 자작(子爵) 후지나미(藤波言忠) 등에게 훈장을 주고, 2월 28일에도 일본 육군중장 이노우에 미쓰루(井上光) 등에게도 훈장을 주어 일본 유력층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이런 한편 이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인사를 단행해 내각의 친일파들을 당혹하게 하기도 했다. 이토는 1906년 4월 21일 업무 협의차 일본으로 가서 6월 23일 귀국하는데 그 사이인 5월 28일 고종은 의정대신에 민영규(閔泳奎)를 임명했다. 민영규도 합방 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 친일파이긴 하지만 고종은 자신이 정승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 1906년 8월 28일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훈2등을 서훈하는 등 매국적 친일파 달래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완용은 고종을 믿지 않았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따르면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대신을 빈번하게 경질해서 친일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협력해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주한 주차군사령관에게도 ‘황제의 성격을 고칠 수 없으니 마지막 수단으로 한국 역사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는 폐위(廢位)를 단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자신과 서너 명의 동지가 폐위를 단행할 테니 일본은 뒤에서 동의만 해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오히려 일본 측에서 세계 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폐위에 소극적으로 나올 정도였다. 참정대신 박제순은 같은 친일파지만 이완용처럼 대놓고 고종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 박제순 내각을 강하게 성토하고 나섰다. 송병준의 배후는 1901년 2월 도야마 미쓰루(頭山<6E80>)·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이 결성한 일본 낭인 집단 흑룡회(黑龍會)였다. 만주 흑룡강 유역을 일본 영토로 삼겠다는 취지의 이름이니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대(對)러시아 개전론을 적극 주창하고 한국은 물론 만주·몽골·시베리아 지역까지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大)아시아주의를 제창한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첨병이었다. 흑룡회 주간 우치다가 일본 정계의 흑막(黑幕:배후 실력자)인 스기야마(任山茂丸)의 추천으로 통감부 촉탁이 되면서 한국 점령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흑룡회의 손발이 송병준과 일진회였다. 흑룡회는 1930년 편찬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에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을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송병준은 일본에서 인삼 재배, 직물 염색 등을 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오타니(大谷喜藏) 소장을 따라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하면서 직업적 친일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1897년 5월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지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송숙준(宋肅畯:송병준)은 이때 이미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郎)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고 나오니 일찍이 창씨개명을 한 셈이다. 송병준은 러일전쟁 와중인 1904년 8월 전 독립협회 회원 윤시병(尹始炳) 등 300여 명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전국 조직이 필요해지자 그해 12월 이용구 등이 동학의 잔여세력을 규합해 만든 진보회(進步會)와 통합해 일진회를 만든다. 일진회는 러일전쟁 때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만주를 오가며 정보를 수집해 일본군을 도왔고, 1906년 2월 28일에는 통감으로 부임하는 이토를 위해 ‘歡迎(환영)’이라는 큰 현수막을 남대문에 내걸기도 했다.

송병준은 1906년 10월 이일직(李逸稙=이세직(李世稙))의 옥새도용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다.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이 이일직에게 밀칙(密勅)을 내려 국내 이권을 외국인들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상납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각되자 고종은 이일직이 사적으로 옥새를 도용한 단독 소행으로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송병준이 이일직을 숨겨주었다가 체포된 것이다. 상납금 일부를 가로채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일한합방비사는 이때 흑룡회의 우치다가 이토 통감을 만나 송병준을 석방시켜 주고 일진회 고문으로 추대됐다고 전하는데, 이를 계기로 송병준의 친일행각은 도를 더한다.

급기야 1907년 5월 2일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제출하고 총사직을 권고했다.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 무렵 박제순도 참정대신 자리에 목매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매천야록은 “이때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제순은 크게 두려워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약간 공분(公憤)을 토하면서 사직했다”고 적고 있다. 나인영은 훗날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 격인 대종교(大倧敎)를 중창하는 나철(羅喆)이다. 나인영 등이 폭약 2궤(櫃)를 “미국인이 보냈다”면서 박제순·이지용에게 보냈는데 박제순 집안 사람이 열려고 하는 것을 박제순이 막아 겨우 살아났다.

참정대신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제순이 1907년 5월 22일 사임한 뒤 그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했다. 내부대신은 임선준(任善準), 군부대신은 이병무(李秉武), 학부대신은 이재곤(李載崑)으로 바뀌었는데 사흘 후인 25일에는 조중응(趙重應)이 법부대신이 되고, 송병준이 삼품대신이란 조롱 속에 농상공부 대신으로 발탁되었다. 박제순 내각이나 이완용 내각이나 같은 친일내각이지만 이번 내각은 이완용·조중응·송병준의 삼각 친일편대가 전면에 등장한 매국내각이었다. 조중응은 영조 때의 소론 영수 조태억(趙泰億)의 후손으로 노론 가문 일색인 친일 관료 집단에 소론 출신으로 드물게 합류했다. 이완용 내각은 고종 축출 특임내각이나 다름없었다. 일한합방비사는 이완용 내각이 수립된 후 고종은 이완용이 궁중에 들어와도 만나주지 않거나 ‘박 참정(박제순) 사직 후 매일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거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늑약 체결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박제순 내각이 그나마 차악(次惡)내각이었던 셈이다. 급진개화파 김옥균은 물론 온건개화파 김홍집까지 모두 죽여버린 고종의 업보였다.

궁지에 몰린 고종의 승부수가 헤이그 밀사 파견이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906년 6월부터 10월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감부문서 1907년 5월 19일자를 보면 통감 이토는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한국 황제가 외국에게 운동한다는 음모는 작년 이후 항상 계속되고 있는데, 전적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의지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계책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종의 속셈을 정확히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토가 추측한 헐버트가 아니라 이상설(李相卨)이 밀사였던 것 정도가 허를 찌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