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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점과 선의 거장’ 이우환 화백 - 알렉산드라 먼로 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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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먼로
구겐하임 뮤지엄
아시아 미술 수석 큐레이터

‘점과 선의 거장’ ‘여백의 화가’ 이우환(74) 화백이 6월 24일부터 9월 28일까지 미국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이우환: 무한의 제시(Lee Ufan: Marking Infinity)’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그의 북미 지역 최초의 회고전이다. 구겐하임 뮤지엄의 전시도 한인으로는 2000년 백남준씨에 이어 두 번째며 아시아 출신 작가로는 백남준, 중국의 차이궈창(2008)에 이어 세 번째다. 로비의 원형 홀에서 시작하는 전시는 6층까지 나선형 갤러리와 4·7층의 부속 갤러리 2곳에 걸쳐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제작된 조각·회화·드로잉·설치작 90여 점이 선보인다. 회고전을 기획한 알렉산드라 먼로 삼성 아시아미술 수석 큐레이터와 이 화백이 대담을 했다. 먼로 큐레이터는 미술가이자 철학자이며 시인이자 이론가인 이 화백의 작품세계를 탐구하는 질문을 던졌다.

●초기 작품에 ‘점에서’와 ‘선에서’ 시리즈가 나온 배경은.

 “네댓 살 때 내게 글씨와 그림을 가르쳐 준 분이 있다. 그는 ‘우주 만물은 점에서 시작해 점에서 끝난다’고 했다. 그림은 점에서 시작되며, 점이 이어지면 선이 된다. 선은 시간을 뜻한다. 점이 모이면 그림이 되고, 사람이나 바위가 될 때도 있다. 그러나 흩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동양의 고대사상을 주입해 주셨는데, 그것이 남아 훗날 내 그림의 모티브가 됐다.”

●이번 전시는 이우환의 역사적인 모노하(물질파) 작품을 선보인다. 모노하의 선두주자로서 그 운동의 중요성은.

 “모노하(物波·School of Things)는 1967∼68년께 시작된 운동인데, 그룹이라기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하나의 현상이었다. ‘모노하’는 사실 비평가들이 붙인 것이다. 당시 조각이나 회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물건이나 내던져놓고 있다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했을 때 그림을 너무 못 그린다고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모노하도 처음부터 평가받은 것이 아니었고,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모노하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엔 히피운동이 시작되고, 미술에선 미니멀 아트가 평가받았다. 유럽에서도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초라한 미술’의 뜻) 등 비슷한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종래의 식민주의·제국주의가 깨지고 아이덴티티가 흩어지며, 제멋대로 물건은 물건, 말은 말로 분리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우환 화백 [사진=조용철 기자]

●조각엔 자연을 상징하는 돌과 산업적인 쇠를 주로 사용했는데.

 “모노하는 ‘만든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의 양면성과 그 관계를 보는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컨셉트와 그것들 사이의 방해하는 요소의 관계를 중시한다.”

●이번 전시엔 모노하(1968~71) 시기 작품 14점이 선보인다. 71년 파리에 모노하를 소개한 전시 후 조각에서 시작해 회화로 돌아왔다. 그림으로 돌아온 이유는.

 “71년 파리 전시에 갔다가 뉴욕에 들렀다. MoMA(뉴욕현대미술관)에 와서 바넷 뉴먼의 전시회를 본 후 ‘이젠 그림을 그려도 괜찮겠구나’고 느꼈다. 전엔 공간·물질·행동 등 직접성이 강한 표현을 했는데, 뉴먼 전을 보고 나름대로 많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반감도 있었다. 너무 필드(field)가 강하고, 남성 중심적인 기둥(pole)을 세워서 이질감을 느꼈다. 난 추상성이 높은 그림을 그려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디어나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행위를 살리는 것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점 찍기, 선 긋기는 누구나 하는 것이다. 점과 선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은 새로운 그림의 출발점이었다.”

이우환 화백의 Correspondence(1995)

●미니멀 아트와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60∼70년대 일본에 많은 정보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재스퍼 존스 등 미국과 유럽의 작가·비평가들이 왔다 가기도 했다. 모더니즘이 깨지면서 ‘다시 출발하자’고 하면서 단색이 되고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는 방법과 요소를 단순화하고 체계적으로 하는 것에 포커스를 두었다. 미니멀리즘에 일부 영향도 받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현대미술의 출발점을 공유하는 것뿐이다. 미니멀 아트의 영향보다는 개인적인 발상이 더 강했다.”

●후기로 갈수록 작품에 여백이 더 커진다. 여백의 중요성은.

 “열심히 체계적으로 그리다 보니 몸이 기계가 되어야 하는데, 몸에 한계가 있어서 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땀이 나고 떨려서 그림이 똑바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림이 깨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깨진 대로 해체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 몸이 다시 회복돼 깨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됐다. 80년대 미국에 뉴페인팅이 나왔는데, 당시 나의 그림도 비슷하게 됐다. 깨지면서 흩어지는 현상이 화면에 나타나다가 80년대 후반엔 점점 붓 놀림이 정리되면서 줄어들며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난 화면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차차 그려지지 않은 여백의 부분을 중요시하면서 그림이 단순화, 절제되고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의 관계가 정리되어 90년대 그림에서 비로소 나타났다. 90년대 들어 붓 놀림이 4∼5개에서 1∼2개로 엄격하게 줄었다. 그리지 않은 캔버스의 부분, 즉 여백과 그림, 더 나아가 캔버스와 벽과 관계의 울림으로 변화해갔다.”

●전시 제목 ‘무한의 제시’는 당신의 책에서 왔다. 제목의 의미는.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생각하는 무한은 머리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내 생각은 안과 바깥과의 관계를 무한이라고 본다. 관계성에서 보이는 것이 무한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구겐하임이나 다른 미술관, 아시아, 유럽 혹은 아프리카에서는 다르게 보인다. 거기서 무한이 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무한이다. 모네가 성당을 그릴 때도 봄, 여름, 겨울, 아침, 점심, 저녁 때 볼 때 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그렸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그릴 때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외계는 늘 무한이다. 모든 관계할 때마다 변하고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나의 무한 개념이 시작된다.”

●당신은 17권의 저서를 냈다. 미술가이자 이론가·철학가로서 그리기와 글쓰기 관계를 설명하면.

 “나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시각적인 미술뿐이 아니라 글도 있다. 원래 나는 문학소년이었는데, 일본에 가니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글쓰기가 힘들었다. 처음엔 내 작품에 관한 글을 쓰다가 점점 우주, 현실 등에 대해 쓰면서 생각이 역동적이 되고 풍부하게 됐다.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뉴욕 머물며 무엇을 하나.

 “롱아일랜드 햄프턴에 가서 작업에 쓸 돌을 구해볼 예정이다.”

정리=뉴욕 중앙일보 박숙희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이우환

1936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 입학. 대학 1학년 때 일본행, 니혼대학에서 철학과 편입. 60년대 후반 철학 이론을 적용시킨 모노하 운동의 선구자가 됨. 67년 도쿄에서 개인전, 71년 파리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국립현대미술관(94년), 프랑스 국립쥐드폼미술관(97년), 호암미술관(2003년), 독일 폰 쿤스트미술관(2005년), 브뤼셀 왕립미술관(2009년), 뉴욕 페이스윌덴스타인 갤러리(2009년) 등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었다. 도쿄 다마예술대학 교수, 파리 에콜드보자르 방문교수 등을 지냈으며, 수필집 ‘여백의 예술’ 시집 ‘멈춰 서서’ 등과 이론서를 내기도 했다. 2010년 일본 나오시마에 이우환 미술관 개관. 일본의 가마쿠라와 파리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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