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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전광판 영상갤러리- 디지털로 꿈꾸는 세상'

중앙일보

입력

새해 1월 1일부터 2월 29일까지 서울 시내 일부 전광판에서는 이색전시회 하나가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황성옥씨가 기획한 `2000 전광판 영상갤러리- 디지털로 꿈꾸는 세상'이 그것이다.

초대되는 작가는 퍼포먼스의 이윰씨와 비디오의 한계륜.민인기씨, 화가 이진경씨, 애니메이션의 오돌또기 등 6명. 이들은 각 10일씩 릴레이식으로 전광판에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기존의 전시공간이 아닌 거리에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뿐 아니라 첨단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예술적 감성과 결합하는가 보여준다. 예술도 이제 디지털시대의 한복판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실험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등 하이테크놀로지로 대표되는 이른바 디지털 시대는 문화예술의 양상마저 크게 바꿔놓고 있다. 대중예술은 물론 음악, 미술, 연극, 무용 등 순수예술장르도 격변하는 시대흐름 속에 일정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먼저 미술의 예를 들어보자. 최근 들어 국내에는 웹갤러리라는 새로운 모습의 전시장이 등장해 미술관이나 화랑을 직접 찾아 작품을 감상하던 방식에 도전장을 냈다. 선두주자는 가나화랑이 운영하는 가나웹갤러리. 이는 98년 1월 첫선을 보인 이후 `언니네 사진관' `명랑음식점' 등 세 차례의 기획전시회도 어엿하게 가졌다.

웹갤러리 기획전시회는 현실 공간의 작품을 가상으로 단순히 옮겨놓은 사이버 전시와도 다르다. 예컨대, 올해 1월의 `언니네 사진관' 전시회는 사진작품을 가상의 단층사진관 건물에 선보이는 것이고, `명랑음식점'은 요리사의 작품을 역시 가상의 음식점에 소개한 것이었다.

현실공간의 작가들도 디지털 시대라는 도도한 흐름에 속속 동참하고 있다. 올해베니스 비엔날레에서 < 노래방 작업 >으로 특별상을 수상한 이불씨도 첨단매체를 이용해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 < 사이보그 >는 애니메이션 동영상의 이미지를조각화했다.

양만기씨 역시 컴퓨터를 제작에 끌어들여 전혀 새로운 예술를 창출해낸다. 국내 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5년여 전부터 디지털에 주목해 컴퓨터 기술과 언어를 평면회화와 설치, 영상작품에 반영하고 있는 것. 그는 1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상에서 열리는 초대전에 50점의 이색작품을 내어 흐름의 변화를 예고했다.

무대예술에서도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현상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음악의 경우, 98년 미국 UCLA에서 초연된 디지털 오페라 < 영광의 괴물들 >은 '미래예술의 전조를 보여주는 극도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작품이었다'는 찬사를 들었다. 공연시간인 75분 동안 가수나 배우는 단 한 사람도 출연하지 않은채 3차원 컴퓨터그래픽의 가상세계가 거대한 스크린에 투사됐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는 필립 글라스가 작곡한 음악이 연주됐다.

인터넷의 일상화는 음반유통 시스템도 바꿔놓고 있는 추세. 조PD는 자작곡 8곡을 MP3 파일로 만든 뒤 컴퓨터 통신에 올려 가수로 데뷔했다. CD와 카세트 테이프 대신 컴퓨터와 다운로드 파일로 대체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영국의 시장조사회사인 MTI는 2010년에는 디지털 음악 전송사업이 전체음반매출의 20%선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음악계는 디지털이 공연형태까지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내다본다. 오케스트라 공연의 경우 지휘자가 서울에서 연주단을 지휘하는 가운데 프랑스 파리의 바이올린 협연자 모습과 음향이 디지털 영상으로 생생하게 공연장에 나타나는 모습을 상정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실황 콘서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전시.공연분야의 디지털화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이에 대해서는 시각에 따라 전망이 엇갈린다. 그리고 분야별로도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과학기술의 산물인 디지털이 문화예술 자체를 지배할 것이라는 견해와 문화예술은 인간의 창조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 만큼 우리가 상상하는 디지털화는 쉽게 일반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맞서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광연 교수는 과학기술이 여러 형태로 예술가와 예술활동 그리고 예술작품에 영향을 주어왔다면서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며 전자에 무게를 싣는다. 그는 컴퓨터는 예술가의 창조력을 극대화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도구뿐 아니라 예술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혜실 KAIST 교수도 디지털 시대가 정착하면 창조주체로서 인간능력이 의심되고 부인돼 결국 `예술가는 죽음에 이른다'고 비극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컴퓨터가 음악도 만들고 소설도 쓰면서 인간감성이 개량됨으로써 심하게 말해 예술가들은 창조자라는 패러다임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견해가 지나치게 과학의존적이며 문화예술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연극연출가 전훈씨가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 중 하나로,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연극 등 특히 무대예술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가 진행될수록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며 이에 따라인간 감성을 기초로 한 공연예술은 더욱 각광받는다는 전망이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씨는 그 근거로 연극을 가장 선호하는 계층이 다름아닌 네티즌이라고 말한다. TV가 영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컴퓨터가 TV를 대체하지 못했듯이 무대예술은 결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디지털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고, 현대인은 벌써 디지털 세계의 한 가운데 들어서 있지만 문화예술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지는 속단할 수 없다. 다만, 문화예술의 속성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현상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디지털이 인간의 창조력과 숨결을 어느 정도 선에 대체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서울=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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