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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인감 퇴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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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도장(圖章) 혹은 인장(印章)의 역사는 유구하다. 고대 사회에서부터 본인 확인의 징표, 신분과 권위의 상징물이었다. 기원전 4000년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은 원통형 점토에 조각한 인장을 사용했다. 기원전 3000년께 이집트에선 인장과 반지를 결합시킨 ‘인장 반지’가 만들어졌고, 이는 로마제국으로 이어졌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장은 기원전 14~11세기 은나라 도읍지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은새(殷璽)다. 나무토막 서간(書簡)을 봉하는 진흙에 인장을 눌렀다고 한다. 봉니(封泥)라고 불린다. 인장 제도가 정비된 건 진시황 때다. ‘부절령(符節令)’이란 관직을 두고 각종 인장 관리를 맡겼다. 황제가 쓰던 인장이 새(璽)다. 진시황 이전엔 재질이 흙이나 도기다. 진시황이 옥(玉)으로 만들면서 비로소 옥새(玉璽)로 불렸단다. 한(漢)나라 때 관리에게 준 관인(官印)엔 수(綬)라고 하는 끈이 달려서 관인을 허리에 찼다. 관직에 나가는 걸 ‘인수(印綬)를 띤다’고 했던 까닭이다.

 인장의 전성기는 유럽 중세 때다. 왕·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학과 길드, 개인들도 사용했다. 그러나 15~16세기께부터 사인(sign), 즉 서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글을 아는 지식인들에게 사인은 인장보다 세련된 증명 표시였다. 물론 도난이나 위조로 인장이 악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결정적 계기였다. 글씨를 모르면 사인을 모방하기 쉽지 않았을 테니까.

 조선 시대에도 사인 관습이 있었다. 바로 ‘수결(手決)’이다. 관리들은 문서 결재를 할 때 일심(一心)이라는 글자를 뜻하도록 서명을 했다. 양반가에서도 거래·계약 문서에 직함과 이름을 적고, 인장 대신 글자 모양을 그려 서명했다. 이름을 초서로 흘려 쓰거나 글자체를 뒤바꾸는 식이다. 글자를 모르는 상민이나 천민은 ‘수촌(手寸)’이란 서명법을 썼다. 문서에 손가락을 대고 윤곽을 그려 넣은 것이다. 남자는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여자는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사용했다.

 1914년에 도입된 인감 제도가 내년부터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도장 대신 서명이 쓰이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인감 위·변조 사고를 막고, 서명 보편화 추세에 부합하려는 조치라고 한다. 그런데 서명은 위·변조로부터 안전할까. 병조판서 백사 이항복이 자신의 ‘수결’ 양끝에 몰래 바늘구멍을 내 진위를 가린 것처럼 묘안을 짜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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