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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캄풍’ SK맨들 … 인니서 브리지스톤과 ‘고무농장 결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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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저기가 정말 거길까요?” 2008년 8월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섬 타나붐부군의 한 산자락. 세 남자는 막막했다. 비포장 산길의 끝이었다. 그 앞으로는 끝도 보이지 않는 ‘녹색 정글’이 펼쳐져 있다. 70~80m 높이의 열대림이 만든 정글 속은 한낮에도 캄캄했다. 쪼그리고 앉아 담배만 피우기를 30여 분, 빨간색 행복나비(SK그룹 로고) 마크가 찍힌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가 우리 땅인지 확인할 방법이….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해야 합니까.”

인도네시아 칼리만탄=한은화 기자

▲SK네트웍스의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섬 고무농장에서 현지 직원들이 고무나무를 가꾸고 있다. SK는 2013년까지 연간 3만2000t의 고무액을 채취할 계획이다.
▶10개월 된 고무나무 옆에서 현지 직원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크게보기>


SK네트웍스가 인도네시아의 오지 중 오지로 꼽히는 칼리만탄섬에 고무농장을 만들기 위해 첫 조사팀을 파견했을 때의 모습이다. 서울 면적의 절반(2만8000㏊) 크기의 부지에 2013년까지 700만 그루의 고무나무를 심는 사업이다. 사업비는 5000만 달러(약 557억원).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마구잡이 벌채로 황폐해진 밀림을 60년간 무상으로 임차했다. 고무나무를 심어 황폐해진 밀림을 복구하는 동시에 지역 주민에게 농장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기업 조림지’ 사업권을 따낸 것이다. 이 농장에서 생산될 천연 고무량은 연간 3만2000t. 국내 타이어 업체들이 해외에서 수입하는 양(42만t)의 7% 규모다.

 SK가 지난 11일 이 인도네시아 고무농장을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농장에 가기 위해 수도 자카르타에서 1시간40여 분 비행기를 타고 칼리만탄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S자 비포장 산길을 6시간 달렸다. 마침내 빨간색 글씨로 ‘SK네트웍스’가 적힌 입간판이 나타났다.

 농장에 가면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에 서 있는 아름드리 고무나무들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상상 속의 농장은 없었다. 대신 높고 낮은 구릉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구릉지마다 열대림을 베어내고, 고무나무를 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곳곳에 정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지에서 일하고 있는 신명섭(44) SK 플렌테이션 사업팀장은 “고무나무는 심은 후 5년이 지나야 액을 채취할 수 있어 중소기업은 엄두도 못 내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사업권을 딴 후 나무를 심고 고무액을 채취하기까지 최소 10년이 걸리는 셈이다. 신 팀장은 “2009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조림 작업이 이제 30%(4000㏊, 여의도 면적의 5배) 정도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칼리만탄의 ‘오랑캄풍’(촌사람) 상사맨=농장에는 SK네트웍스 직원 4명이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 하정수(64) 고문, 신 팀장, 서창오(39) 과장, 강연치(29) 사원이다. 황토색 작업복을 입은 이들은 원주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농장에 근무하는 현지인들은 이들을 ‘오랑캄풍’(촌사람)이라 부르고 있었다.

고무농장에서 근무 중인 네 상사맨. 서창오 과장, 하정수 고문, 신명섭 팀장, 강연치 신입사원.(왼쪽부터)



 하 고문은 이곳에서 ‘전설’로 통한다. 1973년부터 자원개발회사인 코데코의 직원으로 칼리만탄섬에서 근무했다. 칼리만탄 계곡을 눈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30년간 섬 곳곳을 누볐다. 은퇴 후 국내에 머물던 그를 SK가 이번 사업을 위해 스카우트했다. 역시 코데코 출신인 신 팀장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국적을 인도네시아로 바꿨다. 자원·광산 등의 개발이 현지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 과장은 7년 동안 본사 인력개발팀에서 ‘책상 근무’만 했던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였다. 강 사원은 고무농장을 위해 특채된 산림공학과 출신의 신참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숙소도 없었다. 널빤지에 천막을 치고 지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말라리아 모기와 싸워야 했다. 하늘에서는 ‘거머리 비’가 내렸다. 60~70m 높이의 나무에 붙어 있던 거머리가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떨어진 것. 서 과장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새 빨아먹은 피로 밤톨만 해진 거머리를 뗄 때마다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고 회상했다.

 1차전은 길과의 싸움이었다. 수풀이 우거져 땅 밑조차 확인할 수 없는 정글을 중장비로 밀고 들어갔다. 비가 와도 길이 망가지지 않게 자갈을 깔았다. 그렇게 낸 길만 100㎞가 넘는다. 하 고문은 “이 길은 우리 농장의 생명줄”이라고 했다.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되자, 원주민들이 땅 소유권을 주장하며 들고일어났다. 이들은 ‘여기부터 내 땅’이란 말뚝을 농장 곳곳에 박기 시작했다. 허리춤에 30㎝ 길이의 정글용 칼을 찬 채 사무실로 와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 와중에 잃어버린 소를 변상해 달라는 원주민까지 있었다.

 ‘우리 편 만들기’라는 묘책을 짜냈다. 목소리가 제일 큰 싸움꾼부터 농장 일꾼으로 취직시킨 것. 설명회를 열어 “농장이 생기면 7000여 명이 수액을 채취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고, 마을 발전을 위해 학교도 짓겠다”고 약속했다.

  하 고문은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사업이 진행되기까지 원주민들과의 ‘소통’이 가장 어려웠고, 중요했다”고 했다. 그는 “다른 회사들이 고무농장 허가권을 따려고 할 때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SK 농장을 먼저 견학하라’고 권할 정도로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원개발 각축장 된 인도네시아=SK네트웍스의 고무농장 주변에는 일본 타이어 회사인 브리지스톤 등 외국 기업들이 운영하는 고무농장이 즐비했다. 고무농장에서 60㎞ 떨어진 항구를 잇는 길에는 25t짜리 덤프 트럭들이 인근 석탄광산에서 캐낸 석탄을 가득 싣고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현재 칼리만탄섬에선 인도네시아 석탄공사를 비롯해 외국 기업들이 석탄 채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곳의 석탄광은 노천광이다. 시루떡처럼 까만 석탄과 흙이 켜켜이 쌓여 있다. 대부분 칼로리가 낮은 ‘중저탄’으로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원자재 값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SK의 고무농장 일부에서도 석탄이 나온다. 신 팀장은 “광물 허가권을 따로 받아야 하지만 칼로리를 분석한 뒤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소재 : 인도네시아 남부 칼리만탄 타나붐부군

▶조성 기간 : 2009년 9월 말~2013년

▶면적 : 2만8000㏊(고무나무 700만 그루 )

▶고무 생산량 : 연간 3만2000t(국내 수입량 의 7%)

▶총 사업비 : 5000만 달러(약 557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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