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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내의 막막한 일상 그는 혼자 살지만 혼자가 아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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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33면

‘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시인의 시 제목이다. 주체인 내가 슬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주인이 되어 나를 돌보고 부리는 내용이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떠나지 않는다…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詩人의 음악 읽기 필립 글래스 ‘흐느적거리는 나날(Liquid Days)’

어느 자리에선가 황인숙이 그 시를 언급하며 슬픔이 나를 깨문다로 읽었다. 킥킥 웃으며. 좌중의 사람들도 다들 킥킥, 따라갔다. 왜들 웃음이 나왔을까. 혼자서, 마치 생을 견디듯이 원고료만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그녀. 그런데 시인은 고독이나 생계곤란 따위에서 슬픔을 찾지는 않으려는 듯이 보였다. 그 복잡계 정서가 ‘깨문다’로 튕겨져 나왔고 좌중은 공감의 킥킥을 함께 나눈 것이다.

필립 글래스(사진)의 ‘흐느적거리는 나날(Liquid Days)’이라는 곡이 있다. 어떤 외로운 사내의 막막한 일상과 아득한 심리 상태. 그는 혼자 살지만 혼자가 아니다. <사랑은 나를 좋아하지 사랑은 신발을 벗고 소파에 앉는다 무엇에든 어울리고 그래 바로 이거야… 나는 사랑에게 맥주를 권하고 텔레비전을 본다 목욕도 해야 되고 면도도 한다 의자에서 굴러내려 바닥에서 낄낄대다 뛰어일어난다 사랑을 보고 웃는다…> 황인숙의 슬픔 대신 필립 글래스는 사랑을 불러냈다. 슬픔이든 사랑이든 멀미가 나는 낱말인데 왜 이 노래에서는 그토록 생뚱맞게 들리는 걸까. 가공의 사랑이라도 지어내야 하는 일상 때문일 것이다. 5분 남짓한 노래에서 잠을 잔다가 여섯 번, 나를 마신다가 네 번, 운전한다, 숨 쉰다, 잠잔다가 여러 번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외로운 사내의 흐느적거리는 나날들.

‘Songs From Liquid Days’ 음반 표지.

나, 내일모레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독신자로 오래 살았었다. 그 시절 세월은 참 더디갔다. 광화문 독신자 아파트에서 삼림처럼 우거진 판더미에 둘러싸여 밤마다 빙글빙글 LP만 돌리며 살았다. 이때 반복 또 반복해 듣던 음반이 필립 글래스의 ‘흐느적거리는 나날의 노래들(Songs From Liquid Days)’이었다. 음악이 문학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음반이 그랬다. 자칭 ‘스와니의 지하실’이라고 부르던 바퀴벌레, 노래기, 문둥박쥐가 서식한다고 시에 썼던 내 공간에서 흐느적거리는 나날의 노래처럼 와닿는 것이 또 있을까. 나는 모든 색깔 가운데 부연 색, 모든 소리 가운데 멍멍한 소리, 모든 냄새 가운데 쿰쿰한 냄새를 잘 안다. 흐느적거리는 나날이었으니까.

그런데 필립 글래스다. 현대음악의 족보 속에서 그는 부담스럽게 큰 존재고 어렵고 심오하다고 한다. 이우환의 그림을 그냥 보면 흰 면에 애매한 붓질이 죽죽 그어져 있을 뿐이지만 해설서로 들어가면 ‘동양적 선(禪)의 세계’ 어쩌고 하면서 뇌세포를 파괴하는 문장이 난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긴 출세작 ‘해변의 아인슈타인(Einstein On The Beach)’이든 초기 중요작 ‘반대적 움직임의 음악(Music in Contrary Motion)’이든 그의 미니멀 혹은 나중의 맥시멀 음악 속에서 슬픔, 사랑 따위의 길거리 감성을 찾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유럽에서 라비 샹카의 인도음악이나 초월적인 비의예술까지 흠뻑 섭취하여 자기화시킨 그가 아닌가.

하지만 ‘흐느적’ 음반의 재킷을 펼치면 사정은 달라진다. 달콤한 린다 론스타트며 폴 사이먼, 수잔 베가 등이 등장한다. 팝송의 한복판으로 현대음악이 불쑥 들어간 것이다. 로리 앤더슨, 로체스, 데이비드 번 등도 나온다. 약간 예술로 비틀린 뮤지션들이지만 그래도 대중성 쪽에 가깝다. 이런 인물들이 필립 글래스와 작사 작곡을 함께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그 전에도 글래스는 데이비드 보위나 브라이언 이노 같은 로커들과 음악적 교류를 한 바가 있다. 요컨대 글래스에게는 대중음악과 순수예술 사이의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나는 필립 글래스를 들으면서 소위 ‘어렵거나 난해한 음악’에 대한 부담감을 지워나갔던 것 같다. 아무리 괴상하거나 의도적으로 지루하게 만든 곡이어도 그 안에 감춰져 있는 황인숙 시의 역설적인 킥킥이나 ‘흐느적’ 음반에서 느꼈던 인생파적 공감대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나 브람스 현악 6중주에만 페이소스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광화문을 벗어나 이제 나는 흐느적거리는 나날을 살고 있지 않다. 슬픔에 깨물리지도 않는다.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생의 함량이 줄어든 탓이다. 슬프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방송 진행과 강의, 원고 집필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혼자 쓰는 널찍한 지하의 작업실 ‘줄라이홀’에서 음향과 향기와 빛깔을 만끽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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