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출신 해방군 보내달라”…김일성, 남침 직전 요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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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31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血)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등 출병을 요청하는 벽보가 도시·농촌 할 것 없이 난무했다. 1950년 겨울 베이징 교외 난위안쩐(南苑鎭).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의 한국전 참전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련과 북한의 등쌀에 떠밀린 흔적이 역력하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고 지지를 희망했다. 스탈린은 거절하는 대신 “남한 군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반격을 핑계 삼아 38선을 넘어버려라. 단 중국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0>

김일성은 스탈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같은 해 5월 초, 마오쩌둥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 김일(金一)을 비밀리에 베이핑(北平·10월 1일 신중국 선포 후에 베이징으로 개명)으로 파견했다. 김일을 만난 마오는 김일성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남한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북한은 상대가 안 됐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 뻔했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대만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土匪)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마오쩌둥의 입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는 집과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국적으로 관제 시위가 줄을 이었다. 1950년대 초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며칠 후 두 사람은 서쪽 교외에 있는 향산(香山)의 쌍청별야(雙淸別墅)에서 다시 만났다. 북한 인민군 정치부 주임을 겸하고 있던 김일은 “인민군 간부를 배양해야 한다”며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 국적 병사들을 귀국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토를 달지 않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전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국땅을 밟았다. 몇 개월 후 동족상잔의 비극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과연 알기나 했을지 궁금하다. 한국전쟁 초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들의 귀국은 남침 2개월 전인 이듬해 4월 중순, 마지막 병력이 원산항에 도착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3개 사단을 꾸릴 수 있는 규모였다.

중국과 소련은 9월 말에도 무력통일을 지지해 달라는 북한의 요청을 받았다. 양측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거절했다.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중·소동맹호조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과의 신조약이 체결되면 소련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누리던 권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시선이 한반도를 향했다.

1월 19일 스탈린은 “김일성이 무력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겠다며 스탈린 동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의 전보를 받았다. 11일 후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한반도에 대한 전략을 공격으로 전환하겠다며 당부를 반복했다. “직접 만나보니 마오쩌둥은 동북아 문제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의견을 구해라. 중공의 동의가 없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만일 미국이 간여한다면 소련은 조선을 도울 수 없다. 중국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마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라.”

3월 중순 김일성은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 이주연(李周淵)을 통해 마오쩌둥 면담을 요청했다. 마오도 집히는 게 있었던지 이주연에게 구두로 전달했다. “통일에 관해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극비리에 와라.”

마오쩌둥은 대국의 최고 지도자답게 의심이 많았다. 중난하이(中南海)에 거주하는 소련어 통역을 일주일간 톈진(天津)으로 놀러 보낸 후 김일성을 만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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