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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외신 통해 북한 남침 사실 알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2호 33면

1951년 4월, 중국인민부조위문단(中國人民赴朝慰問團) 단장 랴오청즈(廖承志왼쪽 첫째당시 통전부 부부장 겸 신화사 사장)와 부단장 마오둔(茅盾오른쪽 첫째당시 국무원 문화부장) 일행을 북한군 총사령부로 초청한 김일성과 박정애. [김명호 제공]

1950년 5월 13일 밤,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소련이 남침에 동의했다. 직접 중국 측에 전달하라고 해서 왔다”면서 유창한 중국어로 지지를 요청했다. 마오는 즉답을 피했다. 음식 얘기로 시간을 끌며 김일성이 눈치채지 않게 저우언라이를 소련대사관으로 파견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1>

이튿날 소련 측에서 답변이 왔다. “조선 동지들과의 회담에서 빌리프(스탈린)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조선인들의 계획에 동의했다”면서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고도 남을 내용을 첨가했다.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토론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아라. 상세한 내용은 조선 동지들을 통해 듣도록 해라.”

마오는 그동안 자신을 따돌린 스탈린의 처사가 괘씸하고 불쾌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5월 15일 김일성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속전속결로 끝내라. 생산시설만 집중적으로 파괴하면 된다. 대도시를 점령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미국이 참전하면 우리도 군대를 보내 돕겠다”며 김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마오 몰래 소련으로부터 전쟁물자를 공급받은 김은 “동의한 것만으로 족하다”며 자리를 떴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 날 마오는 스탈린이 보낸 전보를 받았다. 의견을 구한다며 단둥(丹東)에서 선양(瀋陽)까지 인민해방군 몇 개 사단을 배치해 주기를 희망했다. 마오는 그날로 답전을 보냈다. “해방군의 동북 투입은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그간 전쟁을 치르느라 소모가 컸다. 소련 측에서 장비와 무기만 제공한다면 병력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스탈린도 “장비는 우리가 해결하겠다. 단, 하루라도 빨리 부대를 동북의 동남지구에 배치하기 바란다”고 화답했다.

6월 25일, 마오는 오후가 되어서야 프랑스 통신사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의 정식 통보는 사흘 후, 그것도 베이징 주재 북한 무관을 통해서였다. 같은 날, 스탈린이 보낸 전보도 받았다. “김일성은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심과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중공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은 당시 마오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를 회고록에 남겼다. “주석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염을 깎았다.”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인근에 사는 비서 스쩌(師哲)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김은 전략과 책략이 틀려먹었다. 성질이 급하다 보니 출병 시기도 잘못 잡았다. 기반이 없는 남쪽으로 더 내려갈까 봐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인천 쪽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면 북한군은 허리가 잘린다. 그러면 아주 위험해진다.”

마오는 김일성에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라고 건의했다. 김은 마오의 말을 듣는 듯했지만 결국은 무시했다.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자 마오쩌둥도 서서히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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