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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전자·자동차·선박 …‘아시아 공급 사슬’이 위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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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동일본 대지진의 산업 피해는 일본 열도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중국·한국·대만과 동남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아시아 생산분업 시스템(Asian Production Network)’ 역시 큰 충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이 분업 구조에서 최상위 기술을 제공하는 ‘허파’와 같은 존재. 일본의 산업 피해가 장기화할 경우 아시아 제조업이 자칫 동맥경화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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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산업의 충격이 가장 크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 정보기기의 회로기판 칩 고착제인 BT(Bismaleimide Triazine)수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 제품 전 세계 공급의 약 90%를 일본이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을 생산하고 있는 미쓰비시 가스 케미컬(MGC)이 이번 쓰나미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아 지난 11일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언제 재개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 회사 제품이 주로 수출되는 곳이 바로 대만이다. 대만의 관련 회사들은 BT수지를 이용해 회로기판을 만들어 중국의 완제품 공장으로 넘긴다. MGC가 조업을 중단하면 저 멀리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의 폭스콘 공장도 아이폰 생산을 멈춰야 한다. 한국도 일본에서 스마트폰 제작용 시스템 반도체를 수입한다. 휴대전화 하나에 일본·한국·대만·중국이 묶여 있는 셈이다. 지진은 그렇게 아시아의 ‘공급 사슬(Supply Chain)’을 끊어놓고 있다.

 앤드루 루 바클레이스캐피털 시장분석가는 FT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동아시아의 BT수지 재고는 45일분 정도”라며 “이 기간 내에 MGC의 공장이 다시 돌지 않는다면 세계 스마트폰 생산의 50%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히타치·스미토모 등 다른 일본 업체가 BT수지를 제조하지만 특성에 차이가 있다”며 “일본의 지진은 결국 동아시아의 생산기업, 더 나가 세계 각국의 소비자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낸드(NAND)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도 절대적인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 전원이 없는 상태에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 부품은 일본이 전 세계 공급의 약 35%를 차지한다. 이번 지진의 타격을 비교적 덜 받았음에도 지난주 현물시장 가격이 10% 안팎 급등하는 등 불안한 움직임이다.

 전자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자동차·철강·조선·기계 등의 아시아 생산네트워크도 충격을 받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태국이 일본 지진의 직격탄을 맞았다. 월스트리트 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도요타 태국 현지 공장은 생산 감축에 나섰다. 캠리와 프리우스 생산에 필요한 변속기를 일본에서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분야의 경우 우리나라와 세계 1, 2위를 다투는 중국은 선박엔진의 30%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이석제 이사는 “우리나라와 일본은 조선기자재 분야에서도 서로 경쟁 관계이지만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며 “일본의 선박엔진 관련 업체들이 타격을 받는다면 중국 역시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생산분업 시스템의 핵심 국가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對)일본 수입액은 약 643억 달러. 이 중 70% 안팎이 중간재(부품+반제품) 형태다. 업계 전문가들은 지진으로 인해 일본의 산업 피해가 지속된다면 전자·기계·소재 등을 중심으로 부품 조달 애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정환우 박사는 “한국·일본·대만 등 4개국의 역내 수출에서 부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60~75%에 이르고 있다”며 “일본 지진은 역내 국가 간 부품 공급 라인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국내 일부 산업에는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진 피해로 인해 동아시아 공급망 재편이 이뤄진다면 경쟁 관계에 있는 우리 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석제 이사는 “자동차·철강·조선 등 우리나라가 이미 경쟁력을 갖춘 산업은 일본이 놓친 부품 공급라인을 거둘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지진이 동아시아의 생산 분업에 어떤 충격을 줬는지를 면밀히 연구하고,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우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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