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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리더십이 부른 대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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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일본인들의 침착함에 온 세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 하지만 이면을 읽는 힘도 필요하다. 일본 신문의 사설은 점잖기로 유명하다. 불편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제 아사히신문 사설은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도쿄전력에 ‘각오해 달라’고 질책했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그 말은 그대로 정부와 총리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사설은 “정보 공개가 너무 늦고 설득력도 없다…책임자를 후쿠시마(福島)에 배치해 생생한 정보를 즉각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이 정도라면, 한마디로 일본 사회 밑바닥에선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봐야 한다.

 분노의 첫 표적은 도쿄전력 경영진을 향하고 있다. 몸만 사리고 사고를 덮기에 급급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원전 2호기의 급수펌프에 연료가 떨어진 것을 깜빡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더 위험한 1호기와 3호기에 신경을 쓰느라…”라고 해명하지만 궁색한 변명이다. 그제는 4호기에 저장된 사용후 핵연료의 냉각수 수위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재(人災)라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지금 2호기와 4호기가 최악의 상태다.

 한때 도쿄전력은 일본 최고의 기업이었다.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을 도맡은 적도 있다. 이런 회사가 ‘잃어버린 10년’ 이후 연일 구설수에 올랐다. 대표이사(CEO)들이 능력보다 고분고분한 후계자만 고른다는 것이다. 사장→회장→명예회장으로 이어지는 자리 욕심이 깔려 있다. 이 회사에서 “일 잘하면 상무, 말 잘 들어야 사장”이란 소문이 나돈 게 우연이 아니다. 뒤틀린 지배구조는 결국 2002년에 범죄까지 낳았다. 후쿠시마 원전의 허위 점검과 균열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것이다.

 간 총리를 향한 시선도 싸늘해지고 있다. 일본의 최고 지도자는 위기가 닥치면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전통이다. 참모들도 “비상대책에 부산한 실무진에 폐를 끼친다”며 현장에 가는 것을 말린다. 간 총리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현장에 가야 한다”며 후쿠시마 제1원전을 찾았다. 총리를 맞아야 할 현장 실무자들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총리가 떠난 3시간 뒤 1호기가 첫 수소 폭발을 시작했다.

 일본 국민의 불만을 산 ‘계획정전’도 마찬가지다. 당초 도쿄전력 사장이 밝힐 예정이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간 총리가 “내가 직접 발표하겠다”며 고집해 예정보다 2시간 늦어졌다고 한다. 이후 국민의 불편이 커지자 상황은 바뀌었다. 혼선 책임을 도쿄전력이 뒤집어 쓴 것이다. 일본 언론들도 눈을 흘기기 시작했다.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려 대지진을 정치적 퍼포먼스로 이용하는 게 아니냐”라고…. 간 총리가 대지진 수습을 위해 두 명의 참모를 새로 기용한 것도 역풍을 맞고 있다. 공교롭게 한 명은 한신(阪神) 대지진 때 반정부 삐라를 뿌린 사회운동가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쓰나미에 대비한 대형 방파제를 반대해온 인물이다.

 꾹 참고 있던 일본 국민들도 점점 불편한 기색이다. 아마추어 리더십에 대한 불만도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는 16일 오후 6시 현재 일본 신문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의 현장 증언이 꼬리를 물고 있다. “대지진이 나자마자 천장의 파이프가 떨어지고 엄청난 물이 샜다” “이미 건물 내부가 심각하게 파손된 상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경영진이 사태를 과소평가해 초동 대응에 실패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제 일본 원전 위기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배제하지 못하는 막다른 상황이다.

 이쯤에서 우리 자신을 복기해 봤으면 싶다. 초대형 위기가 와도 괜찮을까? 청와대와 정부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까? 낙하산·회전문 인사의 공기업들은 도쿄전력과 달리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선보일까? 한국형 원전의 안전성보다 사람부터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우리는 믿을 구석이 있어 다행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는 능력을 보고 사람을 쓴다”고 했으니….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