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만학도 안정순·김미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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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사서 꿈꾸는 50대 소녀

지난 2일 숭의여대 입학식장 문헌정보과 학생들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학부모인가 싶게 지긋한 나이의 그는 다름아닌 11학번 새내기 안정순(54)씨다.

“드라마를 보면 대학생들이 캠퍼스 잔디 밭에 누워 책을 읽잖아요.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한번 해보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웃음).”

막연히 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꿈은 다시 공부를 하면서 도서관 사서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안씨는 “나이 많은 사서를 필요로 하는 곳도 있지 않겠냐”며 기대에 차있다.

지난달 평생교육기관인 일성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안씨는 “처음에는 고등학교 졸업장만 따려고 했는데 대학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다”며 기쁘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이다.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안씨. 언니는 첫째인 덕분에, 둘째인 오빠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이 당연시 됐지만 셋째인 안씨부터는 집안 살림을 도와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했다.

결혼 후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나니 가슴 한켠에 접어두었던 학업의 꿈이 살며시 떠올랐다. “주변에선 ‘학교 다녀서 뭐 할거냐’ ‘졸업장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있냐’고 만류했어요. 혼자 묵묵히 시작했는데 공부에 대한 열의가 크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씩 응원해주더군요.”

성적표가 나오면 부모님께 보이듯 남편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보는 둥 마는 둥 반응이 없다가 계속 90점 이상을 받아오니 기특했던지, 남편친구들을 통해 들은 얘기론 ‘공부 잘하는 아내’ 자랑을 자주 한다고 했다.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현저히 떨어진 ‘기억력’ 탓에 공부 한 걸 되풀이해야 했던 것이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깜빡 하기 일쑤인데 암기와 이해력이 바탕이 돼야 하는 공부는 오죽했겠냐”며 고교시절을 회상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3시까지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고 남편이 귀가하기 직전까지는 공부가 되건 안되건 책상에 앉아 책과 씨름했다.

대학생활을 앞둔 안씨의 마음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스무 살 동기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조금 위축됐다”며 “과 동기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이 두 명 더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웃어 보였다. 학기 초에는 공부뿐 아니라 동기·교수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기 위해서도 노력할 참이다. “인기 가수도 눈여겨 보고 젊은이들끼리 통하는 말도 알아둬야겠다”며 의욕을 다졌다.

“고민하기 전에 도전하세요”

고등학교에 입학한 주부도 있다. 주부 대상의 평생교육시설인 한림초·중·실업고등학교의 고교 과정에 입학한 김미숙(52)씨는 이 학교에서 중학교 2년 과정도 마쳤다. 김씨는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집안일과 회사일을 병행하는 게 부담이었다. 남편과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그의 휴대전화는 수시로 울린다. 수업 내용에 빠져들라치면 거래처에서 전화가 걸려와 집중력을 흐려놓기 일쑤였고, 회사일 때문에 부득이 수업에 빠져야 하는 날도 있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오전에는 건강 관리를 위해 수영을 배우고 매일 오후 1시 30분부터 5시30분까지 학교 수업을 듣는다. 스스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이제는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고등학교 생활은 중학교 때 보단 훨씬 잘 조절하며 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하다.

이제 김씨의 목표는 당당히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것이다. 아들딸 모두 사회복지과에 다니고 있는 데다 내년에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는 남편의 희망 진로 역시 사회복지과다. 온가족이 함께 요양시설을 운영하려는 꿈이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안씨나 김씨처럼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뒤늦게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이들은 4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올해 일성여중·고 중등 과정에 입학한 이아기 할머니는 82세로, 전국 최고령 중학생이다. 아들 둘을 모두 박사로 키워낸 열혈주부 김용자(60)씨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초·중 과정을 마치고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들의 공통된 한마디는 “고민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라”는 것. 안씨는 “학교 덕분에 졸업장은 물론 자신감과 열정까지 되찾을 수 있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진설명] 숭의여대 문헌정보과 새내기 안정순씨가 입학식장에서 선배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하현정 기자 happyha@joongang.co.kr 사진="김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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