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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 살아있는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구엔 지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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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AP=본사 특약]

‘붉은 나폴레옹 (Red Napole­on)’.

 생존하는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베트남의 보 구엔 지압 (Vo Nguyen Giap·武元甲) 장군. 베트남전에서 처절하게 패한 미국의 언론조차 그를 이렇게 칭송했다.

 한반도 내 반목과 중동에서의 살육이 멈추지 않는 혼돈의 시대에 평화는 어떻게 꽃필 수 있는가. 올해 만 100세를 맞은 역사의 연출자 겸 증인인 지압 장군. 그가 1만1000여 명의 프랑스군을 섬멸했던 디엔비엔푸 전투의 첫 포성이 울린 건 1954년 3월이었다. 전설의 전투 57주기에 맞춰 세기의 전략가로부터 전쟁과 평화의 관계를 듣기 위해 베트남을 찾았다. 그는 “평화는 전쟁 의지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절묘한 패러독스로 시작, 프랑스·미국에 이어 중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비결과 은퇴 후의 삶 등을 털어놓았다.

-디엔비엔푸 승리 의미는 무엇인가

 “이 전투는 식민지 지배를 받는 국가가 제국주의 강대국을 처음으로 물리친 역사적 사건이다. ”

-프랑스와 미국·중국을 차례로 격퇴시킨 원동력은

1996년 10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 의회 회기 첫날, 휴회 시간을 이용해 커피를 즐기고 있는 세기의 명장 보 구엔 지압 장군. 당시 의회에서 그는 경제적 현안에만 몰두하지 말고 장기적 안목으로 국가 발전을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노이=로이터]

 “노예로 사느니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인민들의 의지가 베트남의 독립을 가져왔다. 결국 자유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베트남은 1000년간 외적의 침입을 견뎌 왔다. 이 나라엔 지옹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아이가 북쪽에서 적이 쳐들어오자 갑자기 건장한 장수로 돌변, 격퇴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그 정도로 베트남인들은 외적과의 싸움에 익숙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압 장군이 월맹군을 이끌고 남베트남을 함락시킨 날은 1975년 4월 30일. 다음 달 말로 36주기가 되는 셈이다. 맹장도 흐르는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었다. 베트남 외교부가 그와의 면담을 약속했으나 유난히 추웠던 하노이 날씨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해 그가 다니는 병원 측에서 장시간의 인터뷰를 금지했다. 결국 먼발치에서 보는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15일 그를 40년간 비서로 모셨던 트린 응위엔 후안 대령이 사전에 전달해준 질문지에 대한 지압 장군의 대답을 전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지압 장군의 친필 사인. 그가 본지와의 인터뷰 기념으로 전달해 왔다.

-프랑스와 미국의 패인은.

 “ 우리는 프랑스와 미군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인이 어떤 사람들 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들지 않았다. 우월한 무기만으로 충분히 이길 것으로 오판했다. ”

-미국과의 싸움은 다르지 않았나.

 “디엔비엔푸 승리는 미국과의 베트남전에 큰 교훈이 됐다. 그리하여 68년 구정 때 베트남 전 지역에서 일제 공격을 단행했다. 군사적 작전이면서도 정치·외교적 작전이었다. 미군을 쓸어낼 순 없지만 전쟁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신속하고 대담하게 싸움으로써 두 전쟁에서 모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1911년 베트남 중부 안싸지방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쇼팽을 좋아하고 프랑스 역사에 심취한 사학도였다. 한때 역사교사와 기자를 지낸 그가 본격적인 무장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건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胡志明·호지명)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알렉산더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명장들의 병법에 통달했다.

1950년대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전략을 논의하는 호찌민(왼쪽)과 지압 장군.

그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건 1954년 베트남과 라오스 접경에서 벌어졌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였다. 압도적인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였지만 지압의 지략이 덧붙여진 베트남 인민의 의지에 무참히 궤멸하고야 만다. 지압은 한국전 때 중국이 노획한 미군의 105mm 포를 지원받았지만 이를 숨기기 위해 디엔비엔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인들은 3개월 동안 밀림을 뚫고 100여 대의 대포를 맨손으로 끌고 갔다. 한 번 힘쓸 때마다 3㎝씩, 하루 평균 800m씩 이동하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지압 장군이 기거하며 사령부로 사용했던 초가집.

- 전쟁에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디엔비엔푸 전투 전인 53년 말, 우리는 이미 프랑스 진지를 기습공격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 측을 살펴보니 임시 막사 같던 진지가 철옹성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대로 공격하면 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 아저씨(호찌민)는 ‘100% 이긴다는 확신이 들 때만 공격하라’고 지시했던 터였다. 그리하여 공격을 연기하고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공격을 미루면 목숨 걸고 정글 속을 통해 끌고 온 대포 등을 되돌려 은신처로 가져가야 할 처지였다. 많은 이가 수적으로 우세하니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퇴각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나는 철수를 강행했다. ”

-미국과 프랑스에 대한 생각은.

 “이들과의 싸움은 제국시대의 부산물이었다. 베트남인들은 이들 나라에 대해 여러 시각을 갖고 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이들과 75년 베트남 전쟁 종식 후에 태어난 사람들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싸움으로 시작해 1000년간의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전쟁이 끝나면 모두와 친구로 지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프랑스군이나 미군을 미워하지 않는다. 전쟁 후 다리를 잃은 미군 참전용사와 그의 아내가 찾아온 적이 있다. 그의 아내는 반전 노래를 작곡했던 인물이다. 베트남전 종전은 베트남인뿐 아니라 전쟁을 반대했던 미국인들에게도 승리였다. ”

-한국군과도 전투를 벌였는데.

 “한국군들이 이 땅에 와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문화가 비슷해 서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한국도 미워하지 않는다.”

-전쟁 후 어떻게 생활했나.

 “ 75년 이후 국방장관과 교육과학담당 부총리 등을 지냈다. 91년 은퇴한 이후에는 특별한 직책 없이 호찌민 사상을 연구하고 베트남 정부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전쟁 경험이 평화 시 도움 됐나.

 “전쟁에서는 첨단 무기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첨단 무기로 무장했더라도 우수한 두뇌가 없으면 다 헛일이다. 이런 교훈을 국가 발전에 응용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각종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전문가 집단의 식견과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싱크탱크를 여럿 세웠다. ”

-국가 발전 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지속가능 성장이다. 나는 76년 교육과학담당 부총리에 취임한 뒤 줄곧 지속가능 성장의 중요성을 역설해 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고 다음으로 개발을 하되 개인 간 평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지압 장군은 하노이 중심부 트란훙다오 거리에 위치한 ‘108 육군병원’의 2층 107호 특별병실에 누워 있다. 100세 노령으로 기력 이 약해졌지만 의식만은 또렷하다. 병실 내에는 문병인들을 위한 별도 거실이 마련돼 있는데 여기 늘 자신이 입었던 군복을 걸어놓는다.

장남 보 홍 남은 “아버지는 은퇴 후에도 베트남은 다른 선진국을 단순히 모방해서는 안 되며 전통과 특성에 맞는 고유한 발전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정부 당국자들에게 조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노이=남정호 국제선임기자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 3월부터 베트남·라오스 국경 지역인 디엔비엔푸에서 월맹군 3만여 명과 프랑스군 1만1000여 명이 벌였던 전투. 지압 장군은 3개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 끝에 55일간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당시 월맹군은 전투가 개시되자 밀림 속에 숨겨놨던 105㎜ 포를 발사해 프랑스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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