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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시리즈를 마치며 (3) 못다 적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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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3년 7월 휴전 뒤 북에서 송환된 아군 포로 환자들이 판문점에 도착해 후송 헬리콥터를 향해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총성은 멈췄으나 전쟁의 아픔은 아주 컸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서둘러 국방력 강화와 경제 개발에 뛰어들어야 했다.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밀릴 때 임무를 받고, 위난에 처했을 때 명을 받들다(受任于敗軍之際, 奉命于危難之間)”는 말이 있다. 『삼국지(三國志)』의 주역 제갈량(諸葛亮)이 작성한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자신이 모시던 군주 유비(劉備)가 죽자 그 아들 유선(劉禪)에게 올렸던 내용이다.

군복 벗은 백선엽 … 또 다른 전쟁이 그를 기다렸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에게 아주 잘 들어맞는 말이다. 1사단장이었던 그는 1950년 6월 25일 교육과정 이수를 위해 서울에서 시흥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에 전쟁을 맞았다. 전선은 오랜 준비 끝에 남침을 시도한 북한군에 마구 밀리던 시점이었다. 그는 그렇게 전쟁터로 뛰어나갔고,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에 빠졌던 3년 동안을 전선의 명지휘관으로 보냈다.

 그는 일선 사단장과 군단장, 대규모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휘한 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며 전선의 잘고 굵은 모든 국면(局面)을 관리했다. 미군의 전략과 전술을 익혔고, 영국군과 프랑스군대 등 유엔 참전국의 장점을 배웠다.

 그가 익히고 배웠던 모든 군사적 지식과 전략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흡수력으로 그는 그런 미국과 선진국의 우수성을 배우고 또 배웠다. 그런 그의 경험과 지식은 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뒤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발휘된다. 병력 40만을 이끄는 한국군 최초의 야전군 사령관으로, 두 번째 취임한 육군참모총장으로, 그리고 주대만과 프랑스·캐나다 대사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펼쳐진다.

 자신이 생명을 구해 줬던 박정희 대통령 정부에서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한국 최초로 지하철을 도입했고, 국영 화학공업회사를 맡은 뒤에는 모두 14개의 공장을 지어내는 ‘실력’을 발휘했다. 전선의 모든 국면을 다뤄 봤던 군인으로서의 경험이 한국의 경제와 사회 개발로 이어졌던 것이다.

유광종 선임기자

#1. 휴전 직후  40만 야전군사령관 … 155마일 휴전선 책임자로

1954년 10월 백선엽 장군의 제1야전군 사령부 개소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테일러 사령관(왼쪽부터).

그는 휴전 뒤에도 특유의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휴전이 현실화하자 대한민국의 가장 큰 현안으로 떠올랐던 게 미군 철수에 따른 국방력의 공백이었다. 국군은 신속하게 전력을 증강해 미군이 떠난 자리를 대체해야 했다. 미군은 가장 믿고 있던 한국 지휘관 백선엽 장군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국군을 20개 사단까지 증편해 그 가운데 40만 병력으로 제1 야전군을 만들어 휴전선 155마일의 방어를 맡긴다는 구상이었다.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떠나 원주의 1야전군 사령부를 지휘하면서 휴전선 방어에 나선다. 백 장군은 이 과정에서 거대 야전군 운영체계를 습득하고, 나아가 미군의 장비와 화력을 물려받아 신속한 전력 증강 작업에 나섰다.

#2. 대한민국 재건  미 공병대 대규모 장비 인수해 경제 재건 활용

정부 각료들이 58년 9월 11일 당시 절실했던 농업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세운 충주비료공장을 시찰 중이다.

미군이 한국을 떠나는 것은 또 다른 기회였다. 그들이 운영하던 막대한 공병용 건설 중장비와 자재 등이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그 교섭과정에서도 백 장군은 미군 최고지휘부와 긴밀한 협의를 거쳐 그들의 장비와 자재 등을 대거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포클레인과 불도저를 비롯한 중장비, 시멘트와 철근·목재·유리 등 미군의 창고에 쌓여 있던 수많은 물자를 한국군이 넘겨받았다. 전쟁으로 무너진 학교 900개를 다시 세웠고, 미군이 남겨준 장비와 자재를 동원해 도로와 교량 등을 복구했다. 당시 가장 절실했던 농업용 비료는 미군이 일본에서 구입해 한국에 제공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의 경제지원 자금 일부를 헐어 비료 공장을 건립했다.

#3. 이승만과 백선엽  이승만 “내무부 맡게” … 백선엽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57년 5월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부부(왼쪽)와 이기붕 민의원 의장 내외가 함께 찍은 사진.

미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백 장군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도 날이 갈수록 깊이를 더했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56년 어느 날 백 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내무부 장관직을 맡으라”고 제안했다. 대통령의 돌발적인 제안에 당장 거부의사를 표명하기 곤란했던 백 장군은 “며칠 여유를 달라”고 한 뒤 다시 경무대를 찾았다. 그가 한 대답은 “저는 군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일생을 군인으로 마치게 해주십시오”였다. 대통령은 한동안 물끄러미 백 장군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 뜻을 접고 말았다.

#4.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  국군 2차 현대화 … 2차대전 낡은 무기 교체

50년대 후반에는 아군의 무기 현대화가 절실한 과제였다. 그 일환으로 미군이 한국에 들여온 어니스트 존 미사일.

57년 5월 다시 총장에 올라 펼친 작업은 역시 국군의 실력을 더 증강시키는 데 집중됐다. 두 번 만났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다시 면담해 국군 전력 증강에 관한 약속을 얻어냈다. 당시 핵심 사안은 미군이 6·25전쟁 중 사용한 뒤 국군에게 넘겼던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노후화한 무기들을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백 장군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약속에다 미군 고위 지휘관들과의 깊은 교분으로 이를 순조롭게 펼쳐갔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주변에는 이기붕 부통령을 비롯한 경무대 비서진과 경호팀의 ‘사람 장막’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정치군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백 장군은 군 고위 장교의 일부가 권력을 향한 욕망에 흔들리면서 전쟁으로 다져졌던 대한민국 군대의 조직과 정신력이 약해지는 것을 그저 두고 봐야 했다.

#5. 4·19와 전역  이승만 하야 뒤 외교관으로 … 대만·프랑스·캐나다 10년

4·19혁명으로 물러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에 새겨진 비문을 깨고 있는 모습. 1960년 8월 27일에 촬영됐다.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백 장군은 다시 연합참모본부(현재의 합참 전신) 총장을 맡았다가 4·19 직후인 60년 5월 31일 군복을 벗었다. 허정 내각수반의 제안으로 ‘자유중국’으로 불렸던 대만의 대사로 나갔다. 장제스(蔣介石)를 비롯한 과거 중국 대륙의 국민당 정부 여러 요인들과도 깊이 교류하면서 중국 현대사의 여러 면모를 체험했다. 이어 5·16이 벌어진 뒤 주프랑스 대사와 함께 유럽·아프리카 13개 국가 겸임대사를 맡았다. 프랑스를 떠난 뒤에는 주캐나다 대사로 다시 임명돼 모두 10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6. 장관으로, 기업인으로  박정희가 교통장관 임명 … 지하철1호선 입안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10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 백선엽 장군을 교통부 장관에 임명하며 악수하고 있다.

군인 백선엽의 명망은 높았다. 그러나 공무원과 국영기업 경영인으로서의 그를 아는 사람은 적다. 그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줬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안으로 입각(入閣)해 교통부 장관을 맡았다. 대한민국에 처음 지하철을 깐 주인공이 백 장군이다. 그는 일본과 치밀한 교섭을 벌여 대규모의 차관을 들여오는 데 성공,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착공했던 당시의 교통부 장관이었다. 그는 서울 지하철 4호선까지 밑그림을 그린 뒤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충주비료, 호남비료,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맡아 모두 14개의 화학공업 공장을 건설했다. 전쟁 중 쌓았던 명지휘관으로서의 전략적 역량, 개인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꾸준함과 성실함, 그리고 겸손함으로 이 분야에서 결코 쉽게 지워질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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