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시리즈를 마치며 (2) 전장의 리더십 5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1952년 2군단장 시절의 백선엽 중장(오른쪽 작은 사진). 그는 이제 아흔이 넘은 노병(큰사진·지난해 촬영)이 됐다. 그가 평생을 지켜온 원칙이 있다. 남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는 자세. 그렇게 내린 결론은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 백선엽 리더십의 무서운 힘이다.

전쟁은 모든 것의 종합이다. 적을 앞에 두고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싸움을 벌이는 데서는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동원하게 마련이다. 병력과 물자, 조직과 기술, 머리와 몸이 이끄는 사고력과 행동력을 모두 쏟아 내야 한다. 그래서 전쟁을 종합적인 예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6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전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전과(戰果)를 올린 이가 백선엽 장군이다. 명장(名將)이라고 일컫기에 전혀 손색없다. 그의 회고록 연재를 마치며 그가 지닌 전쟁 지휘관으로서의 리더십을 정리해 본다.

부하에게 귀 열라, 전선 가까이 막사 쳐라 … 백선엽 리더십

유광종 선임기자

지휘관 장막 속 지략이 전쟁의 승패 가른다

싸움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 지휘관의 지략(智略)이다. 흔히 모략(謀略)이라고도 부른다. ‘싸움터 후방의 지휘관 장막 속에서 펼치는 지략이 전선의 승패를 가른다’는 말이 있다. 모략에는 음모(陰謀)와 양모(陽謀)가 있다. 전자는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은밀한 계책, 후자는 실재하는 힘을 바탕으로 적을 공략하는 우직한 책략이다. 백선엽 장군의 스타일은 음모형보다는 양모형이다. 먼저 틀을 갖추고, 병력과 화력을 꾸준히 키우며, 치밀한 연산(演算) 능력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에 정면 대응하는 스타일이다. 1950년 8월 대한민국의 존망 이 걸렸던 대구 북방 낙동강 교두보의 다부동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장비와 화력에서 크게 달렸던 힘의 불균형을 미군의 지원으로 보충한 뒤 유학산과 수암산 등 고지에서 적의 정면을 받아친 작전이다. 그 이후 벌어진 중공군과의 거듭된 전투에서도 백 장군은 적의 움직임을 치밀하게 읽으면서 강력한 후방 보급력을 다졌고, 결국 틀과 조직력으로 중공군의 천변만화(千變萬化)식 기습과 우회를 막았다.

과거는 묻지 않지만 결론 내면 서릿발처럼 단호하게

그는 참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장수였다. 모든 전략 입안 과정에서 참모와 부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타입이었다. 최종적인 결론은 그의 몫. 그렇게 내린 결론에 대해서는 가을의 서릿발처럼 단호했다. 그리고 부하를 아꼈다. 그들이 먹는 음식과 입는 옷, 지닌 무기의 모든 상황을 꼼꼼히 챙겼다. “잘 먹어야 잘 싸운다”는 신념이 있었고, 그는 전선을 이끌 때마다 보급에 큰 신경을 썼다.

50년 10월 1사단을 이끌고 북진할 때 임진강에서 그는 적 치하에서 생존했던 부하 장병 100여 명을 만났다. 사단 합류를 원했던 그들은 군법으로 치면 부대 복귀를 하지 않은 범법자. 참모의 상당수도 이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오랜 갑론을박이 오간 뒤 사단장이 내린 결론은 “지금은 마음을 합쳐 적을 물리쳐야 할 때다. 과거의 행적은 모두 저 임진강에 버리고 함께 싸우자”는 결론을 내렸다. 부대에 복귀한 부하들은 평양 공략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빨치산 토벌 … 목숨 걸고 지리산 직접 정찰비행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철저하게 피한다. 그는 지휘관의 장막을 항상 전선 가까이에 붙였다. 후방의 편하고 좋은 건물을 마다하고, 전선 바로 뒤의 흙바닥에 텐트를 친 뒤 지휘부를 운영했다. 51년 속초 1군단장 부임 때 강릉의 법원 건물에 있던 군단 사령부를 속초 바닷가 해변으로 옮긴 게 그 사례다. 그리고 항상 전선을 쫓아다녔다. 일상적인 브리핑 등 사령관의 업무를 마친 뒤 그가 다녔던 곳은 일선의 연대와 대대였다. 그곳에서 직접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듣고 적정(敵情)을 살폈다. 51년 가을과 겨울에 벌어진 지리산 빨치산 대토벌 때 그는 직접 적의 사격을 받을 수 있는 공중으로 수십 차례 날아가 미군으로부터 ‘에어 메달’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힘을 이해했고 미국은 그를 신뢰했다

국면(局面)을 만드는 것은 세(勢)다. 큰 틀을 만드는 종합적이면서 거대한 흐름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큰 요인을 미군으로 인식했다. 창군(創軍) 멤버들이 눈부시게 승진하면서 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을 때 백 장군은 부산의 5연대에서 2년2개월여 근무했다. 진급과 요직을 거론하자면 당시 백 장군의 상황은 일종의 ‘침체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겪었던 모든 상황을 미 군사교범 등을 통해 자세히 익혔다. 그리고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군과 소통했다. 미군은 그런 백 장군을 다른 누구보다 신뢰했다. 미군의 신뢰는 젊은 백 장군에 대한 경외(敬畏)로 이어지기도 했다.

권총엔 자신 없지만 미군 155mm 포 끌어왔다

작은 기술, 세기(細技)에는 관심이 없다. 큰 기술에 강하다. 본인은 사격술에도 능하지 못하다. 자신이 지니고 다녔던 권총의 사격에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전쟁 초반 한국군에는 없었던 155㎜ 야포와 미 7함대의 전함 등이 퍼붓는 거대한 포격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꾸준함이다. 전선을 누비고 다녔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가르고, 스스로 역량을 발휘해야 할 곳에 모든 힘을 집중한다. 길게 참고, 자신을 먼저 드러내지 않으며, 사세(事勢)를 꾸준히 살피며, 겸손함으로 남을 대한다. 오래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과감하게 나서 집행한다.

백선엽 장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