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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동물 복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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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7년 미국에서 동물애호주의자들이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 불매운동을 벌였다. 닭을 비인도적 전기충격 방식으로 잡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자 ‘버거킹’은 재빨리 “전기 대신 가스로 기절시켜 잡겠다”고 발표한다. ‘맥도널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닭이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사육면적을 늘리겠다고 했다. 바로 동물복지론이다. 미국 브랜다이스대학 로버트 라이시 교수는 『수퍼 자본주의』에서 “맥도널드의 인간적 도살이란 근로자 부상을 줄이고, 더 많은 고기를 얻어내는 기법을 뜻한다”고 꼬집는다.

 장자(莊子)의 양생(養生)편에 ‘백정의 도(道)’가 나온다. 능숙한 백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지만, 이 백정은 19년째 하나를 쓴다. 그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며, 힘줄이나 뼈를 건드리지 않아 칼이 무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식사법 ‘코셔(kosher)’도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찔러 2초 안에 죽이라’고 했다. 고통을 덜어주라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적일까.

 1980년대 미국 LA에서 코요테를 몽둥이로 잡은 아시아계 주민이 법정에 섰다. 비인도적 동물학대죄로 기소된 것이다. 변호사는 사슴의 눈을 응시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디어 헌팅(Deer Hunting)’을 들어 “총은 인도적이고, 몽둥이는 비인도적이란 기준이 뭐냐”고 따졌다. 수단이 뭐든 동물에겐 죽음 자체가 비인도적이란 주장으로 무죄를 이끌어냈다.

 동물에게 인간은 고통의 근원인가.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멜라니 조이는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 인간의 ‘육식주의’를 질타한다.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자처하며 동물에 대한 연민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개라고 행복할까. 대표적인 실험 대상 아닌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알크마이온은 개의 눈을 해부, 시신경을 발견해 최초의 동물실험으로 기록된다. 1902년 ‘파블로프의 개’는 조건반사를 증명하기 위해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려야 했다. 러시아의 ‘라이카’는 스푸트니크에 올라 최초로 우주를 여행한 지구생명체다. 그래 봐야 장자(莊子)가 말한 ‘교제희우(郊祭犧牛)’다. 제삿날 잡는 소 말이다. 잘 먹고 자수 옷 입어봐야 제삿날엔 하찮은 돼지가 부러운 거다.

 구제역으로 소·돼지 340만 마리가 매몰되면서 동물복지가 화두가 됐다. 가축별 사육면적을 규정하고, 안락사시키며, 매몰 대신 소각하자는 거다. 그러나 이들 동물은 그저 방역당국이 밉고, 인간의 육식주의가 원초적 슬픔 아니겠나.

박종권 논설위원·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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