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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어설픈 공작이 남긴 심각한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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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국가 폭력’이란 말이 있다. 시위대가 폭력 시위에 대한 경찰의 제압 행동을 비난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다. 대부분 상징조작이다. 정당한 법 집행에 그런 낙인(烙印)을 찍어 공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다.

 국가는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 합법의 한계는 어디인가. 판단의 기준은 법이다.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헌법 정신이고,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가치일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온 가치는 우리의 양심이 소중하게 보존해온 도덕률이고, 자유민주적 질서로 구체화해 왔다.

 국정원의 어설픈 롯데호텔 잠입사건 관련 논란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어느 틈에 실용이란 이름으로 이런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진다. 정부나 일부 정치권은 국정원의 ‘서투른 공작’을 질타한다. 들키지만 않았다면 ‘국익을 위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었다는 투다. 정말 우리 정보기관은 그런 일을 당연한 업무로 여겨야 할 것인가. 심지어 조용히 잘 수습돼 가는 것을 왜 문제 삼아 국익을 해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당장은 국제적인 파문을 최소화 하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이익과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가치의 무게를 저울질해 볼 필요가 있다.

 ‘국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엄청난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문제라는 의미 같다. 공작의 대상이 된 인도네시아 특사단은 국산 고등훈련기 T-50을 수입하려고 방한했다고 한다. T-50의 대당 가격은 240억원이나 한다. 50대를 수출하면 1조2000억원. 거기에 장비 지원, 조종사 훈련, 추가 정비사업까지 합치면 수출 효과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은 원전(原電)과 함께 수출 2대 프로젝트로 독려해 왔다고 한다.

 그러면 이 정도의 큰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도 괜찮은가. 어떤 논리로 변호하더라도, 외국 특사단의 숙소에 들어가 컴퓨터를 훔친 행위는 불법이다. 그것도 정부기관이 저지른 불법이다. 방위산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거액의 수출을 위해서라면 정부 기관이 범법행위를 저질러도 괜찮은 것인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는 것과 무기 수출을 위해 정부기관이 법을 어기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 정보기관은 어두운 현대사를 거치며 부끄러운 과거를 견뎌 왔다. 도청과 고문 등 인권유린의 오명을 지울 수 없었다. 민주화 이후 반성을 거쳐 혁신을 추구했다. 국내 사찰(査察)을 줄이고, 해외 산업 정보활동으로 역량을 모으려는 노력은 고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외 활동에서는 법의 통제를 넘어선 행위가 용납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테러 용의자에 대한 중앙정보국(CIA)의 불법행위(고문)가 문제가 되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를 비난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낭비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가권력이 인권침해 사실을 알면서도 방치한다면 ‘미국의 정신’이 무너진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우리도 최소한 이번 사건을 ‘국익을 위한 통상적인 정보활동’이라는 애매한 변론으로 얼버무리고 지나쳐선 안 된다. 이번 사건으로 잃게 된 ‘국가의 품격과 신뢰’는 계량할 수 없다고 소홀히 해선 안 되는 공동체의 기본가치이기 때문이다. T-50 판매로 얻을 수 있는, 계량할 수 있는 이익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국가 안보를 위해 일정 부분 탈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엄밀히 말해 이번 사건은 국가 안보와 직접 관련된 사안이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적성국가도 테러집단도 아니다. T-50을 어떤 조건으로 파느냐 하는 문제다.

 더욱이 국정원이 노린 정보는 수주(受注) 여부를 좌우할 결정적인 내용도 아니었다. 협상 조건 정도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입찰가격을 알아내려는 건설사의 수주전쟁과 다를 바 없다. 어설픈 공작으로 오히려 수출마저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지적은 또 다른 문제다.

 공동체의 보편적 기본가치를 외면한 국익 지상주의는 위험하다. 법과 도덕을 버리는 것은 국민적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며 공동체의 기본질서를 흔드는 일이다. 지금은 외국 정부를 상대로 벌인 일이 언제 우리 내부를 향하게 될지 모른다. 정보활동 전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재검토가 필요하다.

김진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