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독재자들이 사는 법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사담 후세인, 무바라크 등 중동의 악명 높은 군주들은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한다.
그들은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의 은밀한 지원을 받기도 했다

관련사진

photo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심복들은 자신들의 잔혹행위를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

독재자의 몰락은 대개 비슷한 의식절차를 따른다. 고문실이 열리고 전깃줄과 선명한 핏자국이 그의 범죄를 증언해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같은 최악의 독재자의 경우엔 사진도 있다. 그의 고문관들은 꼼꼼한 기록자였다. 피해자의 끔찍한 죽음까지 사진으로 남겼다. 악취가 진동하는 그런 감방에 햇볕이 들면서 감정의 정화가 시작된다. 책임 소재는 반드시 밝혀지고 추궁된다.

튀니지나 이집트에선 아직 고문실이 열리지 않았다. 독재자는 떠났지만 그들의 근위대는 현재 권부를 장악하고 버틴다. 군, 비밀경찰, 첩보요원과 정보원, 심문관, 고문관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은 그 모든 흉포한 방법을 써도 예측하지 못한 민중봉기에 직면해 자신이 모시던 지도자를 내쫓고 자신들은 살아남기로 선택했다.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지금까진 가상적일 뿐이다.

이제야 오바마 행정부는 중동의 민주화 세력을 끌어안으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한 가지 극복하기 버거운 장애물이 있다. 이 지역의 독재자들을 비밀리에, 그리고 때론 공공연히 묵인해 온 미국의 오랜 전력이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시위진압대가 타흐리르 광장 이곳저곳에 남긴 최루탄 탄피에는 ‘MADE IN U.S.A(미제)’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미국만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도 아랍 독재정권들을 지지했다.

하지만 민주화 봉기가 아랍권의 수도를 차례로 휩쓰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라크의 지식인 카난 마키야가 저서 ‘공포의 공화국(The Republic of Fear)’에서 지적한 ‘폭력의 역학(the mechanics of violence)’을 올바로 이해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이 지역의 왕, 평생 대통령, 장기 집권하는 이슬람 성직자들을 그토록 오래 권좌에 머물도록 해주었고, 적어도 당분간은 그들 중 다수가 버티도록 해주는 바로 그 권력의 방패를 말한다.

거의 모든 아랍국은 가문이 통치한다. 그들의 지상 최대 목표는 권력 유지다. 극단적인 종파주의 국가인 레바논처럼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 지역에서 지도자가 자발적으로 물러난 역사는 없다. 1950~60년대엔 정부 교체의 가장 흔한 방법이 쿠데타였다. 49년 3월부터 80년 12월까지 쿠데타가 55건이나 발생했고, 그중 절반가량이 성공했다. 새로운 독재자들은 자신이 쿠데타에 성공한 이유를 교훈 삼아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부하와 국민을 외부세계만이 아니라 서로 간에도 격리시켰다. 사담 후세인은 극단적으로 타자기와 복사기(심지어 구식 등사기도 포함됐다)의 개인 소유를 금했다. 정적이 자신을 음해하는 책자를 유통시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정권에선 복사기 사용이 체제전복 기도에 해당했다.

하지만 정권 생존의 진정한 열쇠는 랜드연구소의 분석가 제임스 퀸리번이 말한 ‘쿠데타 방지책(coup-proofing)’이었다. 퀸리번은 파급효과가 컸던 1999년 연구에서 독재체제의 기본적인 안전장치를 세부적으로 규정했다. 첫째, 정권의 핵심 부분을 ‘가족, 민족, 종교적 충성심’으로 결속시킨다. 마피아와 다름없다. 다양한 겉모습을 한 측근들이 두목을 보호하면서 자신도 보호받는다(그가 무너지면 그들도 함께 몰락한다). 둘째, 정권 보호를 주임무로 하는 준군사 조직을 만든다. 이란의 혁명수비대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정규군을 제치고 최고지도자의 명을 수행한다. 셋째, 비밀경찰, 보안국, 첩보기관을 복수로 설립한다. 그래야 서로를 견제해 쿠데타를 꿈꾸지 못한다.

정규군도 잘 구슬려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장교들을 바쁘게 만들고 ‘전문성 함양’을 통해 직업적으로 만족하도록 해야 한다. 퀸리번은 “그들을 선진국 군사학교에 보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나름대로 위험이 따른다. 외국에 나가 비밀경찰이 감청하지 않는 동안 어떤 이질적인 생각을 갖게 될지 모른다. 예컨대 이집트 장교단은 미군과의 빈번한 합동 군사훈련 동안 미군과 어울려선 안 된다는 엄격한 명령을 따른다.

장교들에게 축재할 기회를 제공해 군을 독재의 동반자로 만드는 방법도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 이집트에선 군부가 부동산 거래로 금전적 이득을 봤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미국 외교 전문에 따르면 “주로 퇴역 장성이 운영하며 물, 올리브유, 시멘트, 건설, 호텔, 가솔린 산업에 종사하는 군 소유 기업들”에서도 이득을 챙겼다. 겉보기에 충직한 장교도 탐욕을 부리거나 질투심을 갖기 쉽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 전문에 따르면 무바라크 대통령의 아들 가말과 가까운 민간인 사업자들과 이집트군 지도자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달 초 군부가 무바라크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았을 때 가장 먼저 쫓겨나 기소된 각료들은 사업가 출신이었다.

쿠데타 방지엔 돈이 많이 든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감당할 만하다. 특히 유가가 지금처럼 높으면 좋다. 하지만 석유가 별로 나지 않는 나라의 독재자는 어떻게 할까? 그들은 주로 힘센 외국에 기댄다. 영국이 70~80년대에 중동 지역에서 대부분 철수하면서 그 공백을 미국이 채웠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운 압델 아지즈 이븐 사우드는 20~30년대에 영국인 첩보요원 세인트 존 필비(악명 높은 제2차 세계대전 스파이로 소련으로 망명한 킴 필비의 아버지)를 개인 보좌관으로 삼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이 더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고 존 브레넌(현재 오바마 백악관에서 테러대응을 지휘한다) 등 리야드 주재 역대 CIA 지국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동의 민주화 운동가들로선 CIA의 개입이 위험하고 민감한 문제다. 하지만 그런 흔적이 역력하다.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미국은 이집트, 요르단 등 우호적인 아랍 정부와 공조해 제3국(알바니아, 이탈리아 등)에서 테러 용의자를 체포한 뒤 각자의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그들은 본국에 송환된 뒤 심문, 고문, 때로는 처형당했다). 이런 ‘송환’ 제도는 테러를 일삼는 정적 제거에 도움이 됐기 때문에 독재정권의 입맛에 맞았다. 그래서 한동안 그런 관행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요소가 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중동에서 벌어진 미국의 비밀활동 중 한 측면에 불과하다. 외교관 신분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중요한 상대와 대화 채널을 유지하는 일도 미국과 다른 서방국 첩보요원들의 주요 비밀임무 중 하나였다. 미국이 야세르 아라파트나 그가 이끈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공식 접촉이 없었던 수년 동안 CIA는 PLO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뮌헨 올림픽 테러를 감행한 검은 9월단의 배후 알리 하산 살라메도 포함됐다.

미국의 비밀 접촉은 아랍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 CIA는 아라파트 진영과 대화 채널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도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다. 그에게 자금을 대고 요르단 정보국(GID) 설립을 도왔다. 여러 워싱턴 소식통에 따르면 GID는 아직도 미국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 70~80년대에 GID 본부는 ‘손톱 공장’으로 알려졌다. 그곳에서 사용된 ‘강화된’ 심문 기법을 암시한 별명이다. 90년대 들어 후세인 국왕은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을 무너뜨리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CIA와 긴밀하게 협력했다(하지만 실패했다). 보스니아에선 미국의 정보 수집을 돕기도 했다. 당시 후세인 국왕과 함께 일한 CIA 고위관리는 “그는 진정으로 세계적인 사고를 했다”고 돌이켰다. GID는 1999년 후세인 국왕의 사망 후 압둘라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압둘라는 그 이래 GID 국장을 잇따라 파면했다. 자신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기관의 충성심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다. 그래서 요르단의 정치적 안정을 두고 우려가 커지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요르단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압둘라 국왕은 전·현직 CIA 요원들의 말을 경청한다.

무바라크는 정권의 장수를 보장하려고 독특한 방식을 동원했다. 쿠데타를 일으킬 정도로 인기가 있거나 또는 ‘똑똑한’ 장성을 키우지 않았다. 군부에서 그의 명확한 경쟁자는 무함마드 아브드 알-할림 아부 가잘라 육군 원수였다. 그는 80년대에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86년 보안군 신병들의 반란 후 거리로 탱크를 몰고 나가 정권 보호에 앞장섰다. 하지만 아부 가잘라의 그런 힘과 위신을 두려워한 무바라크는 89년 그를 내쫓았다.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 육군 원수는 91년 이래 국방장관을 맡았다. 그는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대사관 외교 전문에서 ‘무바라크의 푸들’로 묘사됐을 정도로 지나치게 충성하고 아첨한 듯하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와 무바라크의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간이 닥치자 탄타위는 무바라크를 밀어냈다. 이집트군이 앞으로 이집트를 더 많은 자유로 이끄는 데 도움을 줄지, 단지 군산 복합체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될지 여부는 현재 군최고평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그의 손에 달린 듯하다.

미국이 아랍 독재자들과 결탁해 온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행위를 민주화 과정으로 포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미국은 오랫동안 독재자와 계속 연락하고 종종 비밀리에 그들의 정권을 유지해주면서 활용했다. 하지만 이제 성난 아랍 청년들은 자신들의 독재자 측근·근위대와 미국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며 더 이상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친다. 늘 냉소적인 미국 정부는 공개적으론 시위대 편에, 막후에선 근위대 편에 서고 싶은 심정일지 모른다. 과거에 자주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고문실은 반드시 열리고, 책임은 반드시 밝혀지고 추궁받게 돼 있다.

번역·이원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