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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72) 국군의 힘찬 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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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투는 사령부 상황판에 올라오는 숫자만으로 치르는 게 아니다. 현장은 숫자 이상의 현실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게 전투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장병들의 사기다. 그런 심리적 요인은 숫자로 보고될 수 없다. 그래서 지휘관이 가장 마음이 든든해질때가 전선을 직접 살피는 시간이다. 사진은 1952년 4월 2일 위문공연을 관람 중인 국군의 모습.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튿날부터 모든 물자와 장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금성 돌출부 전투가 사실상 휴전을 앞두고 벌어지는 최후이자 최대의 전투였다. 따라서 나는 동원 가능한 모든 물자와 장비를 전선으로 보내도록 했다.

보급 달렸나? 중공군이 주춤거렸다 … 마침내 기회가 왔다

 서울과 춘천을 잇는 경춘가도는 그런 물자와 장비를 수송하는 차량과 인력으로 가득 메워졌다. 일반 차량은 그곳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군대의 차량과 병력이 그 도로에 가득 올라서 물자와 장비를 날랐다.

 지난 3년 동안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전쟁에 뛰어들어 국군을 먹잇감으로 상정해 집중적인 공격을 벌였던 중공군과의 대회전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3년 동안의 전쟁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이 싸움에서 중공군에 다시 밀린다면 국군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꼴을 면할 수 없었다.

 다행히 국군은 그 짧은 시간에 몰라볼 정도로 자랐다. 그때의 국군은 중공군에 늘 일거에 밀린 뒤 급기야 대규모 군 병력이 와해되는 수준을 분명히 극복한 상태였다. 밀리면서도 반격을 시도했고, 붕괴된 전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다시 대오(隊伍)를 회복해 적에 맞서는 노력을 눈물겹게 펼쳤다.

 1952년에 시작한 국군 포병 양성 프로그램도 효과를 나타냈다. 국군 포병은 겨냥한 지점에 정확히 포탄을 떨어뜨리고 있었으며 중공군은 그 때문에 다소 주춤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단단한 매듭을 지어 후방의 저지선을 다진 뒤에 아직 투지를 잃지 않은 국군 병력을 다시 조직하는 일이 시급했다.

 나는 최후의 저지선을 다시 세웠다. 이곳은 절대 내줄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는 선이었다. 그리고 새 주(主) 저항선도 설정했다. 와이오밍선이라고 하는 최후 저지선 북방 4㎞ 지점이었다. 나는 신속히 최후 저지선과 새 주 저항선의 부대를 다시 배치했다.

 병력과 장비 손실로 전투력이 다소 떨어지는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고, 손실이 적은 부대를 전진 배치했다. 곪은 곳은 제거하고, 찢어진 곳은 꿰매고, 막힌 곳은 뚫어야 했다. 그것은 마치 급한 상처를 받은 환자에게 가해지는 정밀하면서도 과감한 외과(外科) 수술과 같았다.

 나는 그동안 쌓은 내 전투 지휘 경험과 군사 지식을 전부 동원해 그런 수술과도 같았던 작업을 신속하면서 과감하게 실행으로 옮겼다.

 사단의 연대를 빼내 다른 사단으로 이동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싸움에 정형(定型)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실에 맞게 원래의 형체를 허물어 다시 조립하면서 닥쳐오는 위험을 막아야 한다. 이미 그때에는 금성 돌출부 전체를 적에게 내준 뒤였다. 더구나 북으로 솟아올랐던 돌출부가 거꾸로 큰 주머니 형태로 남쪽을 향해 밀려 내려와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나는 장막에서 이뤄지는 전략 구상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휘관이 가장 마음이 든든해질 때는 전선을 직접 살피는 시간이다. 직접 눈으로 전투 현장을 확인하고, 그곳의 분위기와 상황을 현장 전투 지휘관으로부터 듣고 살펴야 한다. 그런 뒤에 전략을 구상하는 것이 좋다.

 작전 상황판은 집약일 뿐이다. 현장을 놓치면 추상적인 구상에만 머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소토고미 사령부에서 나와 전방으로 자주 나갔다. 당시 사방거리는 적과 대면한 최일선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일선 연대장에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다녔다. 그들은 한결같이 병력과 장비 부족을 하소연했다.

 나는 수색대를 적진으로 파견했다. 그때까지의 상황을 모두 종합하려면 적정(敵情)을 직접 살피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색대는 돌아와서 “금성천 이남에는 적의 소수 병력만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즉시 중공군이 이제 머뭇거리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금성 돌출부를 점령하는 성과 앞에서 일단 만족하고 있거나, 그 이남으로 화천 저수지를 치기에는 힘이 달린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내가 그동안의 전투를 겪으면서 지켜본 중공군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반의 우세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군대였다.

 장비와 병력, 전선에서 필요한 물자를 꾸준하게 공급하지 못했던 중공군은 초반의 화려한 전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곤 했다. 비는 계속 내려 아군의 공군기들이 저들을 공중 폭격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나 밀리면서도 강하게 반격하는 국군과 후방 아군 포병의 정밀한 포격이 잇따르면서 저들의 병력 손실 또한 매우 컸던 것이다.

 나는 그런 중공군의 공세가 결코 1주일을 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선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살펴본 결과 이미 중공군의 공세에 이상이 생겨났다는 점을 직감했던 것이다. 현대의 전쟁은 대량의 물자와 장비, 병력이 신속하게 이동하고 탄탄하게 짜여야 한다. 전시에 꾸준히 축적한 국군의 장비와 병력이 전선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미군과 유엔의 전폭적인 지원이 후방을 받쳐주고 있던 아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시점이 왔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한 뒤 새 주 저항선에 몰려 있던 국군 병력에 “우리가 내줬던 금성천까지 강하게 밀어붙여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직접 일선의 연대장을 만나고 다녔다. 그들에게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강력한 어조로 금성천까지 밀어붙이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

 국군은 드디어 중공군이 치고 내려오던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하늘이 주는 환경상의 이점, 천시(天時)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줄곧 내리던 비가 드디어 멈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를 내리는 구름은 이제 서서히 한반도 중동부의 격렬하기만 했던 금성 돌출부 일대의 전역(戰域)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7월 15일 밤부터 날이 개고 있었다.

 반격의 고삐를 강하게 감아쥐어야 할 때였다. 멈칫거리는 중공군을 향해 국군은 일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전선 곳곳은 그런 국군의 반격과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는 중공군의 저항으로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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