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③ 용각산, 중동으로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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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본 류카쿠산을 방문해 제조 과정을 배우고 있는 김승호(왼쪽에서 둘째) 보령제약 회장.


지금 40대 중반 이상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열에 아홉은 옛날 생각에 잠기게 할 만한 말이 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 카피다. 그리고 또 그 아홉 중에 반 이상은 실제로 소리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 알루미늄 용각산 용기를 직접 흔들어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1967년 4월 서울 성수동 공장이 완공되고 보령제약이 처음으로 용각산을 생산한 것은 1967년 6월 26일. 본격적인 생산에 앞서 일본 용각산에서 두 명의 기술자를 파견했는데, 아직도 그들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마음을 다 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본에서 원료로 쓸 생약을 직접 들여와 약을 만들었는데, 그 제조 과정의 세세한 노하우만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품의 핵심 기술은 그들의 어깨 너머로 은밀하게, 조금씩, 그리고 조심스럽게 익혀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전에 일본 제품을 사용해 본 사람들의 입에서 “품질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본사에서 기술진이 나와 원래 사용하던 그 원료 그 기술로 그대로 만들었는데 품질이 떨어지다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선입견이었다. 당시에는 어떤 제품이라도 일단 국내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조건 불신하고, 대신 미제나 일제라면 무턱대고 신뢰를 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같은 제품, 같은 효능이라 할지라도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보령제약 용각산은 이미 일본의 그 명약으로 인식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용각산을 처음 출시한 당시 용각산 추첨행사는 복권 추첨보다 더 설레고 공정했다. 맨 왼쪽이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고민 끝에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미 약국으로 들어간 제품까지 모든 생산품을 회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정에는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 따르고, 어쩌면 회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회수된 제품을 분석한 나는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품의 포장에서 찾았다. 용각산은 둥그런 알루미늄 용기에 분말을 담아 사각의 종이 상자에 넣은 것인데, 용기와 상자의 질이나 인쇄 상태가 기존 일본 제품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회수된 용각산의 용기와 상자를 일본 제품과 동일한 수준으로 새롭게 포장하기로 했다. 새 용기를 만들 원료를 찾기 위해 나는 당시 영등포 일대의 철공소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지만 나는 하루 열두 시간 이상 걸어서 적정한 원료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시간적 금전적 손실이 컸음은 물론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포장을 바꾸어 다시 발매하자 이번에는 “보령제약이 일본 약을 들여와 돈을 벌고 있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등 너머로 일본 기술자들의 노하우를 배우고 그 기술을 우리의 것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생산과정에서 공장 벽에다 내부를 은밀히 볼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놓고 원료 투입 단계와 양을 점검했다. 일요일이면 서울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외출을 하게 한 후 혹시 남겨진 메모나 있는지, 버려진 공정표가 있는지 쓰레기통을 뒤졌다.

 이렇게 품질을 높이는 한편 소비자의 선입견을 잠재우고 품질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용각산에 대해 대대적인 광고를 했다. 직접적인 소비자층을 겨냥한 광고 컨셉트가 연일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광고됐으며, 당시 용각산 광고비는 단일 품목으로는 국내 최고를 기록했다. 또 전국에 걸친 대대적인 샘플링 행사를 벌여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약효를 체험하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약효가 알려지면서 1967년 말부터 소비자들이 용각산을 찾기 시작했고, 1968년을 지나면서 용각산은 보령제약을 대표하는 제품이자 국내 약업계를 대표하는 생약 제제로 자리를 잡았다. 용각산 TV광고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행어를 남겼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용각산은 미세한 분말의 순수 생약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70년대 말 보령제약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 등 중동지역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날아들었다. 당시 중동건설 붐을 타고 현지로 진출한 국내 건설회사들의 근로자들이 보낸 편지였다. 대부분 중동지역으로 용각산을 수출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들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다 연일 계속되는 모래 바람 속에서 현지 근로자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 용각산이었던 것이다. 보령제약은 현지 의약품 수입통관 절차가 까다로운 점 때문에 건설회사에서 국산 의약품을 공동구입한 후 현지로 우송, 환자들에게 직접 공급하는 방법으로 용각산을 보냈다.

 이후 중동 건설 붐이 계속되는 동안 용각산은 한국인 근로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필수품이 됐다. 보령제약에서는 용각산을 수시로 위문품으로 보내 현지 근로자들과 어려움을 나누기도 했다. 열사의 모래 바람 속에서 땀 흘리던 우리의 근로자, 용각산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국내외에서 수많은 우리 국민들의 목을 보호하며 맑고 청명한 소리가 나게 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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