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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71) 테일러의 다급한 요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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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공군은 기습과 기만 전술에 능했지만 현대전에 걸맞은 체계적인 보급선을 갖추지 못한 게 약점이었다. 사진은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함께 데려온 중국 민간인 수송대. 눈밭 속에서 마차를 이용해 물자를 나르고 있다. 6·25 최후 공세인 금성전투에서도 중공군은 말 1만 필과 마차 1500대를 동원했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밤중의 어두운 거실에서 울리던 전화는 절박한 금성 돌출부 전선 상황을 예감케 했다. 전화통에서 울리는 테일러 사령관의 목소리도 따라서 절박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어조로 그는 “백 장군, 당신이 2군단에 가줘야겠소. 지금 아주 급합니다. 내 비행기를 보낼 테니 바로 움직여 주시오”라고 말했다.

“백 장군, 전선으로 가줘야겠소” #절박한 테일러, 전용기를 내줬다 #전황은 생각보다 비관적이었다 #“모든 창고 열어 전방으로 보내라”

 나는 전날 상황을 머리에 담아 둔 채 잠을 잤다. 테일러의 그 짧은 말에 담긴 모든 뜻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알았다”고만 말했다. 그리고 바로 길 떠날 채비를 갖췄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장맛비였다. 중공군이 움직였던 그 계절은 장마철이었다.

 테일러 장군의 전용기는 그래서 필요했다. 당시 서울과 육군본부가 있던 대구를 오가는 교통편은 경비행기였다. 그러나 비가 오면 경비행기는 뜰 수 없었다. 그래서 테일러 장군이 우중(雨中)에도 비행할 수 있는 자신의 전용기 C-47을 보낸다고 한 것이었다.

 나는 관사를 나서 새벽 3시쯤 대구 비행장에 도착해 테일러 장군의 전용기에 올라탔다. 비행시간은 1시간30분가량이었다. 어두운 새벽에 출발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할 때에는 하늘 한쪽으로 부옇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나는 C-47에 몸을 싣고 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테일러 장군은 중공군과 대규모로 싸움을 벌여 보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1950년 10월 평북 운산, 51년 강원도 현리에서 그들과 큰 규모의 싸움을 벌였다. 그 중간에도 크고 작은 여러 번의 전투에서 그들을 경험했다.

 중공군은 ‘밤의 군대’답게 은밀함과 기만, 기습과 우회에 강했다. 그러나 저들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전선이 확대되면서 치고 내려오는 기세가 약해지는 군대였다. 보급선이 길어지는 게 늘 부담스러웠던 군대였다. 쉽게 말하자면 초반의 공세는 강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받쳐줄 후방의 역량이 부족한 게 저들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두려움과 낯섦, 기이함과 불규칙성으로 다가와 아군을 혼돈으로 몰아넣곤 하지만, 그 공세의 지속력은 매우 떨어졌다. 전선에서 그들과 싸우면서 내가 지켜봤던 중공군의 특징이 크게 달라졌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밤의 어둠에 편승해 돌발과 기습을 펼치는 군대였다.

 그들에게 맞서는 힘은 튼튼한 후방 보급력, 그리고 잠시 나타나는 기이함과 불규칙성에 굴하지 않고 적을 끝까지 막아내고 몰아내려는 투지(鬪志)였다. 나는 빗속을 뚫고 날면서 자주 흔들리던 C-47에서 그 점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어느덧 비행기는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앉았다. 공항에는 내가 서울을 오갈 때 영접하는 일을 맡았던 병사구 사령부 민사담당 김완용 대령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김 대령이 몰고 온 지프에 올라타 바로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경춘(京春)가도를 따라 춘천 북방의 2군단 사령부가 있던 소토고미를 향했던 것이다.

 새벽길을 하염없이 지났다. 날이 아주 훤하게 밝은 오전 8시쯤 나는 소토고미에 도착했다. 2군단장인 정일권 장군과 참모, 미 고문관 등이 모두 나와 나를 맞았다. 벌써 육군참모총장인 내가 전선에 직접 뛰어든다는 사실이 통보된 것이었다. 현장에는 미 25사단장 새뮤얼 윌리엄스 소장이 임시 국군 2군단장으로 와 있었다. 미 8군 테일러 사령관이 급박한 전선 상황을 지켜보다가 취한 아주 특수한 사례였다.

 정일권 군단장은 고열(高熱)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아주 증세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는 예전에도 늘 나와 뜻을 함께했던 선배이자 동료였다. 6·25 개전 초기에는 일선의 1사단장인 나를 후방에서 지원했던 국군 초기의 최고 엘리트 장교였다. 나보다는 세 살이 많아 개인적으로는 호형(呼兄)하던 정 장군은 풀이 많이 꺾여 있었다.

 특히 맥없이 전선에서 밀려난 뒤에 고열에 심하게 시달렸던 정 장군은 아주 낙담한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아주 비관적인 표정이 맴돌았다. 그것은 전선의 어느 지휘관에게나 자주 나타날 수 있는 기색이었다. 특히 전투에 나선 지휘관이 다운(down), 즉 하강 국면에 접어들어 결국 넘어서지 못할 때 그런 상황은 찾아온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이제 내가 왔습니다. 마지막 전쟁입니다. 끝까지 잘 수습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달랬다. 정 군단장은 기력이 쇠잔해 보였다. 고열과 밀리는 전선 상황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얼른 들여보낸 뒤에 나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중공군 앞에 내가 다시 섰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그들과 마주쳤던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나는 전선 상황부터 점검했다. 간단한 브리핑을 들었다. 내가 대구를 떠나 소토고미로 오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후퇴하는 전선을 떠받치기 위해서는 단단한 ‘매듭’이 필요했다.

 밀리는 군대를 단단한 사명감과 조직력으로 다시 묶고 중공군의 공세에 대항할 강력한 화력과 장비, 물자를 다시 깔아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우선 상황을 살펴보니 병력 손실에 따른 보충병이 다수 필요했고, 장비 손실이 많아 그에 대한 보충도 필요했다.

 나는 소토고미 군단 사령부에 가서 두 가지 조치를 먼저 취했다. 우선 대구의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유재흥 당시 참모차장을 찾았다. 나는 “모든 창고를 열어라. 그리고 모두 전방으로 올려라”고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대구에 머물던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을 소토고미의 2군단 사령부로 급히 오라고 했다.

 명령은 신속히 이행됐다. 유재흥 참모차장은 내 명령과 함께 모든 전시 물자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로저스 미 군사고문단장도 내 전갈과 함께 움직여 그날 오후 소토고미에 도착했다. 나는 막 도착한 로저스 단장에게 “지금은 장비를 빨리 보충해야 한다. 미군 창고도 열어서 전선으로 빨리 올라오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했다. 그 역시 “예스, 서(Yes, sir)”라며 바로 행동에 나섰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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