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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69) 몰아치는 비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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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0년 11월 북진을 거듭해 평안북도 구성까지 진격한 미군의 한 병사가 북한군을 생포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대규모 병력의 중공군에 밀려 서울을 내준 뒤 휴전 직전까지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거듭해야 했다. 사진 전문지 라이프에 실린 작품이다.


밤에 출몰하는 유령(幽靈)과도 같았던 중국의 군대가 드디어 움직였다. 7월 13일 밤이었다. 늘 그랬듯이 중공군은 야음(夜陰)의 짙은 어둠을 타면서 율동(律動)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음율(音律)과 같은 일정함이 있었다.

대대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부하들과 애국가 부르며 최후 …

 그들은 먼저 상대의 허점(虛點)을 정밀하게 탐색한다. 이어 막대한 병력의 우위를 놓치지 않고 수많은 장병들을 이곳에 집중한다. 거센 사전 포격이 먼저 신호탄을 올리면 정해진 지점에 새카맣게 몰려들어 공격을 벌인다. 그런 일정한 음률과 같은 중공군의 움직임이 7월 13일 밤 9시쯤 강렬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31㎞에 달하는 금성 돌출부의 서쪽 끝은 9사단과 수도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미 9군단에 배속된 국군 부대였다. 먼저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곳은 수도사단이었다. 김화에서 북동쪽 금성으로 향하는 부대 전면은 모두 13㎞. 수도사단은 2개 연대를 전선에 배치하고 나머지 1개 연대를 예비로 운영하고 있었다.

 전면의 2개 연대 가운데 중공군이 노린 타깃은 동쪽으로 배치된 1연대였다. 중공군은 이에 앞서 벌인 4~5월의 탐색공격에서 이곳을 자주 공격해 왔다. 허점이 어디인가를 알아보는 날카로운 탐침(探針)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이곳을 때리면서 앞으로 있을 공격에 대비했던 것이다.

 1연대의 방어 전면은 8㎞로 꽤 넓은 편이었다. 중공군이 이곳을 국군의 전선에 구멍을 낼 타깃으로 삼은 것은 능선이 북에서 남으로 이어져 산줄기를 타고 이동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 능선은 중치령이라는 곳으로, 공격 대오를 이동시키기가 비교적 용이했다. 이곳은 금성 돌출부를 공격하려는 중공군의 5대 접근로 가운데 하나였다.

 수도사단의 정면을 압박한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 일대에서 늘 국군과 격렬한 고지전을 수행했던 부대였다. 따라서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국군 전면에 나서기 전, 중공군은 예의 ‘공격준비사격’을 벌였다. 전달인 6월에 펼쳤던 공세 때보다 훨씬 강렬한 포격이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금성전투』에 따르면 당시의 중공군 공격준비사격으로 일거에 수도사단 방어 전역이 포연으로 뒤덮였다.

 이 공세 속의 중공군은 한층 더 노련한 모습을 보이며 공격을 벌였다. 당시 수도사단의 전선 고지는 동굴처럼 판 참호로 이어져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적이 공격을 펼치면 아군은 동굴 진지 속으로 들어가 후방의 아군 포병에게 직접 동굴 진지 위를 포격하는 ‘진내(陣內) 사격’을 요청했다.

 전선을 지키고 있던 당시 수도사단의 일선 병력은 이 같은 ‘진내 사격’으로 적의 공격에 맞섰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수많았던 고지 쟁탈전에서 중공군은 국군의 이 같은 전법(戰法)을 충분히 익힌 상태였다. 7월 13일 전격적인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은 이 진내 사격의 허점을 잘 활용했다.

 수도사단 일선 고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 일단 국군으로 하여금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에 이를 우회했던 것이다. 고지 자체는 점령하지 않은 채 많은 병력을 고지 아래의 계곡 속으로 침투시킨 다음에 후방에 있던 아군의 포병 진지와 통신 시설을 타격해 온 것이다.

 소규모의 공격을 펼치는 적의 부대에 맞서 싸울 때 이 동굴 진지는 효과적이었다. 고지를 점령한 적의 머리 위로 후방의 아군 포병이 강력한 포격을 실시하면 적은 커다란 피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면적인 공격에서는 동굴 진지로의 대피에 이은 후방의 아군 포격이라는 단순한 방어 전법이 통하질 않았던 것이다.

 중공군의 기만(欺瞞)도 적중했다. 먼저 다른 곳을 공격해 아군의 신경을 따돌린 뒤 엉뚱한 곳을 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수도사단 1연대 정면을 공격하기로 한 뒤 중공군은 인접한 26연대에 먼저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었다. 아군은 26연대 정면으로 중공군이 공격을 펼칠 것으로 보고 준비를 서둘렀으나 결과적으로 중공군은 1연대를 택해 들어왔다.

 중공군은 다른 한 곳도 집중적으로 노렸다. 서쪽에서는 수도사단을 노리면서, 동쪽으로는 국군 3사단을 노렸던 것이다. 3사단 전면에 배치된 23연대를 침투 거점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때렸고, 인접 22연대 또한 타격을 받으면서 중공군에게 뚫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수도사단은 금성 돌출부의 왼쪽 어깨에 해당하는 좌견부(左肩部), 3사단은 오른쪽 어깨의 우견부(右肩部)였다. 중공군은 전체 돌출부의 양쪽을 공격과 침투, 우회 및 포위를 위한 두 거점으로 삼고 맹공(猛攻)을 펼쳤던 것이다.

 우견부의 3사단이 뚫린 정황(情況)도 수도사단의 그것과 유사하다. 한 곳을 노리는 척하다가 다른 한 곳을 치는 기만적인 전술(戰術)이 펼쳐졌고, 공격준비사격이라는 이름의 사전 포격도 비슷했다. 3사단 또한 수도사단처럼 동굴 진지 속에 들어가 아군 후방의 포진지에 진내 사격을 요청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중공군의 유례없는 강렬한 포격으로 통신이 모두 끊기자 많은 수의 아군 장병은 그 동굴진지 속에 머물면서 결국 적에게 생포되거나 끝까지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전선이 급격히 밀리면서 후방의 대대 관측소(OP)가 순식간에 침투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자 어느 한 국군 대대장은 전화기를 들고 중대장들을 불러 함께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금성전투』는 적고 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 두 군데만 밀린 것은 아니었다. 중공군은 먼저 양쪽 견부(肩部)를 뚫은 뒤 후방의 아군 포진지와 관측소, 연대 지휘소 등을 직접적으로 공략하면서 금성 돌출부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중공군의 양쪽 견부 침투로 인해 금성 돌출부 곳곳에 포진했던 아군 부대들이 모두 위기에 놓이면서 돌출부 중간을 맡았던 6사단과 8사단 또한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두 밀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는 눈앞에 막 닥친 거센 폭풍우처럼 금성 돌출부 전역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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