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지리산에서 밝은 미래를 보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 철 호
논설위원

지난 주말 혼자서 겨울 지리산 종주를 다녀왔다. 더 이상 나이 들기 전에 꼭 가보고 싶어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새벽 3시 은은한 화엄사 예불 소리를 들으며 노고단을 향해 올라 천왕봉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오는 코스다. 산꾼들 사이에서 ‘화대(화엄사~대원사)종주’라 불리는 46㎞의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지리산 바람은 장난이 아니다. 종주길 내내 영하 20도를 밑도는 칼바람을 제대로 맞았다. 두 겹으로 낀 장갑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단단히 동상(凍傷)이 걸렸다.

 그래도 지리산은 좋았다. 반야봉에서 굽어본 노고단~천왕봉의 주 능선은 일품이었고,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천왕봉 일출을 보는 행운도 누렸다. 혼자서 가는 산행은 쓸쓸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연하천 대피소 가는 길엔 아빠와 함께 온 중1 소녀와 동행했다. 소녀는 “아빠가 살이 3㎏은 빠진다고 꾀어서 따라왔어요”라며 웃었다. 다이어트 열풍이 지리산 칼바람보다 무섭다. 세석대피소에서 마주친 경남 거창의 50대 부부는 정말 고마웠다. 필자의 동상 걸려 시퍼렇게 부풀어오른 손가락에 직접 발열(發熱)크림을 발라주고 여분의 1회용 비닐장갑까지 선뜻 내주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젊은 20~30대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 것이다. 혼자 지리산 종주에 나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피소 취사장에서 물 끓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리 쉼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그녀들에게 짬짬이 물어보았다(작업을 건 게 아니라 정말 궁금했다).

 -반달곰도 나온다는데 안 무서워요?

 “괜찮아요.지금은 곰도 겨울잠 자잖아요.”

 -나쁜 남자들 마주치면 어떻게 하려고요?

 “힘든 산행엔 남자도 제 한 몸 건사하기 어려워요. 오히려 그런 것보다 부상이나 탈진이 더 무섭지….”

 반야봉의 가파른 비탈길을 헉헉대며 오르다 스틱과 아이젠 차림으로 가볍게 내려오는 젊은 여성을 만났다.

 -배낭도 없이 오른 거예요?

 “어머, 아저씨는 지리산 처음이에요? 저 밑 삼도봉에 배낭을 두고 오르면 되죠.”

 -배낭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걱정 없어요. 깃털 하나도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판에 누가 이 높은 산에서 배낭을 훔쳐가겠어요?”

 그녀들은 당당했다. 당초 마음먹은 들길과 날길을 찾아 칼바람 속을 뚫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물론 눈 덮인 지리산을 오가는 압도적 다수는 대학생 또래의 젊은 남성들이다. 대부분 수수하고 실속 있는 국산용품들로 무장한 것도 마음에 든다. 요즘 가장 눈꼴신 풍경 중 하나가 휘황찬란한 외국산 장비들로 치장하고 동네 뒷산을 오르는 중년 세대들이다. 시조새가 훨훨 날아다니거나 코끼리가 울부짖는 상표들이 넘쳐난다(아마 세계에서 가장 비싼 등산장비 브랜드일 것이다). 한여름에, 히말라야에 오를 때나 어울릴 100만원대의 외국산 하드셸 재킷(방수·투습 능력이 뛰어난 3겹으로 짠 등산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꼴불견도 적지 않다. 산을 타는 건지, 돈 자랑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우리 사회에서 나약한 젊은 세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초식(草食)동물, 캥거루족이라 비난한다. 도전정신과 독립성을 잃고 부모에게 자꾸 의존한다는 것이다.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프리터족, 88만원 세대 같은 서글픈 유행어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지리산에서 또 다른 면을 보았다. 오늘도 수많은 젊은이가 지리산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칼바람과 눈보라를 뚫고 그들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동틀녘 천왕봉은 넘쳐나는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저 멀리서 태양이 솟아올랐다. 누구는 열심히 카메라에 일출을 담고, 누구는 두 손 모아 그들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모두 햇살보다 더 환한 표정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젊은 세대의 밝은 면을 몰랐던 게 아닐까. 갑자기 일출보다 그 싱싱한 얼굴들이 더 장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길고 지루한 대원사 하산길을 가볍게 내려왔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