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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어란·파스타, 과메기·새싹 … 그 신기한 어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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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포항 과메기, 울릉도 명이나물, 제주도 흑돼지와 한라봉. 요즘, 정겨운 향토 식재료가 파인다이닝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사진은 ‘뱅가’의 박영호(37)셰프가 만든 한스푼 과메기.


“추천 메뉴는 어란 파스타입니다. 전남 영암에서 김광자 할머니가 만든 어란이에요.”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 레스토랑 ‘그라노’. 웨이트리스는 분명 전남 영암에서 만든 어란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소했다. 음식 트렌드를 선도한다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김광자 할머니 어란이라니. 김광자(86) 할머니는 60년째 숭어 어란을 만들어 온 영암의 장인이다. 그 어란이 이탈리아 음식의 대표 메뉴 파스타와 어울린다니. 로컬 푸드. 최근 음식업계의 핫 트렌드다. 수입에 의존하던 재료를 국산으로 대체한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향토색 짙은 재료를 셰프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재해석한 요리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향토색 짙은 전통 식재료와 한껏 고급스러운 파인다이닝의 만남. 그 현장을 취재했다.

글=이상은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 향토 식재료의 변신

서울 신사동 와인레스토랑 ‘뱅가’(02-516-1761). 경북 포항 구룡포에서 조달한 과메기로 ‘한 스푼 과메기’를 내놓는다. 과메기를 물미역, 새싹과 함께 다져 올리브오일로 버무리고 스푼에 올려내면 앙증맞은 핑거푸드가 된다. 샐러드엔 레몬 대신 전남 고흥산 유자를 짜넣고, 생선 비린내 잡을 땐 제주 녹차 잎을 쓴다. 소금은 전남 신안산 천일염을 65도 오븐에서 하루 12시간씩 보름간 구운 것을 쓴다.

 ‘뉴 코리안 퀴진’의 대표주자 ‘정식당’(02-517-4654). 의 대표 메뉴는 흔한 보쌈이다. 그러나 이곳 보쌈은 차원이 다르다. 울릉도 명이나물을 접시에 깔고 으깬 감자를 바른 다음 12시간 수비드(진공 저온조리)한 삼겹살을 얹는다. 명이나물로 감자와 삼겹살을 싸 건포도잼에 찍어 먹는다.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의 아시안 레스토랑 ‘아시안라이브’(02-3430-8620)엔 이색 제주 흑돼지 요리가 있다. 제주 흑돼지를 굴소스·팔각·고추기름 등 향신료에 재운 뒤 3시간을 푹 찐 다음 뜨겁게 달군 철 냄비에 담아낸다.

 디저트도 로컬 푸드가 인기다.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 ‘그린테이블’(02-591-2672)의 김은희(36) 셰프는 뽕나무 열매 오디로 타르트를 만든다. 셰프가 내장산에 올라가 직접 따온 오디다. ‘아시안라이브’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제주도 한라봉을 사용해 무스를 만들었다. 껍질 벗긴 한라봉을 조려서 초콜릿무스 속에 넣었다.

# 전통 식재료의 재발견

일부 국내 식재료는 과열 양상이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천일염이다. 2008년부터 대부분 특급호텔과 고급 레스토랑이 당연한 듯이 국산 천일염을 쓰고 있다. 천일염은 법이 바뀌어 2008년 비로소 식품이 됐다. 국내 최대 염전인 전남 증도 태평염전의 조재우(49) 상무의 설명을 들었다.

 “국내 천일염 생산량이 1년에 30만t 정도입니다. 그러나 2008년 이전엔 해마다 10만t 정도 재고가 쌓였습니다. 그땐 수입 정제염만 공인된 식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난해엔 아예 재고가 없었습니다. 법이 바뀌면서 우리 천일염의 품질이 알려진 덕분입니다.”

 좋은 우리 식재료를 찾아내려고 셰프들은 기꺼이 발품을 판다. 미국 유학파 출신 김은희 셰프는 처음에 국내 식재료를 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7년 1년 동안 전국의 농장을 뒤지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알고 보니 우리 식재료는 의외로 활용성이 높았다. “오디는 내장산에서, 청매실은 지리산에서 따와요. 싸게 사려고 해서가 아니에요. 발품을 팔면 팔수록 애정이 쌓이거든요.”

 미슐랭 3스타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61)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재래시장을 찾는다. 한국만의 토속 식재료를 찾기 위해서다. 지난해엔 깻잎을 보고 “이 독특한 쓴 향을 프렌치 요리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연구해야겠다”며 들깨 씨앗을 프랑스로 가져가 심기도 했다.

# 로컬 푸드 열풍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파인 다이닝은 세계적인 트렌드다. 향토 재료만 고집하는 덴마크의 ‘노마’가 지난해 각종 레스토랑 순위에서 1위를 휩쓴 게 대표 사례다. 미국 뉴욕의 인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블루힐’도 2000년대 중반부터 로컬 푸드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파인다이닝 갈라위크’ 기획자 안휴(38)씨는 우리나라도 로컬푸드 열풍이 점점 뜨거워질 거라고 전망한다.

 “오너 셰프와 유학파 셰프의 증가가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해외 트렌드에 민감하니까요. 좋은 식재료의 첫째 조건은 신선함입니다. 그러다 보니 식재료의 이동거리가 짧아지는 겁니다. 과거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블루베리나 아스파라거스 같은 작물도 요즘엔 재배되고 있잖아요. 향토 식재료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겁니다.”

 우리 고유의 식재료가 서양 정찬에 잘 어울린다는 의견도 있다. 세계 3대 요리학교인 츠지조그룹교 서양요리 교수이자 츠지원 이탈리아 요리 교수인 노카미 마사노리(43)는 한국 식재료 중에서 특히 채소를 높이 산다. 마사노리 교수는 “한국 채소는 단단하면서 은근한 단맛이 나 이탈리아 요리에 최적”이라며 “2년 전 한국의 애호박을 처음 주키니 대용으로 쓴 뒤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참, 영암의 김광자 할머니는 서울 레스토랑의 어란 파스타를 잡숴봤을까. 할머니는 “파스타가 뭔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영암에서 어란만 만들어서 못 먹어봤어. 파스타가 뭔지 모르지만 서울 젊은 사람이 지방 음식을 더 많이 먹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젊은이 입맛에 맞게 현대식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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