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감시 잘해야 일류시민 된다 ④ 세금 낭비 막을 대책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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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보조금 등 24억원을 들인 전남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에 있는 화훼생산단지. 사업이 실패로 끝나면서 현재는 폐허로 변했다. [나주=프리랜서 오종찬]

예산 낭비를 막는 힘 역시 시민들의 ‘분노’에서 시작됐다. 세금 낭비에 대한 분노는 시장에 대한 첫 구상권 행사로, 주민예산 참여로, 그리고 주민소송으로 이어지면서 새어나간 세금을 통쾌하게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세금 감시 잘하는 일류시민’으로 가는 큰 걸음은 이미 시작됐다.

나주 농민의 고발

시장이 중금속 땅에 꽃단지 ‘7억 헛돈’

단체장이 물어내도록 구상권 이끌어

◆감사원도 “변상 요구하라”=그릇된 행정 결정을 내린 시장에 대해 구상권이 행사된다. 실무 공무원이 아닌 단체장에 대한 첫 사례다. 치적홍보형·선심쓰기형 세금 낭비를 막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감사원은 지난달 11일 잘못된 행정 처리를 한 신정훈(47) 전 나주시장 등 전직 공무원 5명에게 나주시가 변상을 요구하라고 통보했다. 나주시는 일단 낭비된 국고보조금 7억1000만원을 국가에 납부한 뒤 신 전 시장 등에게 구상권을 행사키로 했다. 시 관계자는 “감사원의 변상명령을 신 전 시장 등에게 통보했다”며 “신 전 시장 등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절차를 밟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나주시는 2004년 공산면 신곡리에 대규모 화훼생산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사업자로 선정된 서모씨에게 국고보조금과 시 예산 등 보조금 12억원을 두 차례로 나눠 지급했다. 그러나 화훼 비닐하우스가 세워진 곳은 ‘광미’(중금속 오염물질이 포함된 광석 폐기물)가 쌓여 있던 곳이다. 서씨는 광미를 제거하지 않고 매립한 뒤 그 위에 토사를 쏟아부어 부지를 조성했다. 당시 한 의원은 “중금속 오염 지역에서 장미가 생산된들 환경을 중시하는 일본이 수입하겠나”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2006년 결국 터무니없는 사업에 분노한 농민이 검찰에 신 전 시장을 고발했다. 곧바로 검찰 수사가 시작돼 서씨는 구속됐다. 이듬해 7월 신 전 시장과 관련 공무원들도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는 ‘단순한 정책적 판단의 실수’라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차 보조금 지급 뒤 서씨의 무자격 등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2차 보조금을 지급한 것은 잘못”이라며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고, 지난해 2월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감사원 배상명령은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봉 주부의 집념

구의원들 의정비 90%나 인상하자
“토해내라” 주민소송 … 1심서 승소

◆서명 운동부터 시작=2007년 10월 서울 도봉구의회 의정비 심의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회의를 지켜보던 주부 정미라(45)씨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 주민여론이나 인상근거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2008년 의정비를 전년보다 90%나 인상한 5800만원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즉각 의정비 동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이를 묵살했다. 정씨는 “겸직이 허용된 구의원들이 겨우 2~3달 성의 없이 회의하면서 의정비를 인상하는 것은 세금 낭비”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씨는 같은 주부인 홍은정·강문선·김윤희씨 등 다수의 주민들과 함께 ‘과도한 의정비 인상 반대’를 위한 거리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민 1000여 명이 호응했다. 정씨와 주민들은 연명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구의회는 “문제가 있으면 법대로 하라”며 사전 공지도 없이 의정비 인상 조례안을 본회의에서 기습 처리했다.

주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서울시 감사실에 주민감사청구를 냈다. 4개월 뒤 감사실은 “주민들의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며 의정감시를 한 주민들에게 포상금 1000만원을 수여했다.

 그러나 구청은 감사 결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결국 법에 호소했다. 2008년 5월 구청장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을 위한 주민소송’을 냈다. 두 차례 공판 연기를 포함, 8번에 걸친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마침내 소송을 낸 지 꼭 1년 만인 2009년 5월 서울행정법원은 “주민 의견 수렴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며 “구의원들에게 1년 동안 과다 지급된 봉급 2136만원(의원 1인당)에 대해 구청장이 반환 청구하라”며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주민소송제가 활성화된 일본은 연간 수백 건의 소송이 줄을 잇는다. 반면 우리는 2006년 주민소송제도 도입 4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10여 건뿐이다. 문제는 네 가지다. 첫째, 지자체의 위법사실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해야 하지만 주민들이 이런 자료에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둘째, 주민소송 제소 기간이 2년 이내로 너무 짧다. 셋째, 소송 전 상급 지자체에 감사청구를 제기하고, 그 이유가 타당하다는 점을 인정받아야 소송이 가능하다. 넷째, 시장·군수·구청장이 구상권을 행사하도록 주민이 요구하는 형태의 간접소송만 인정한 것 또한 제약이다.

과천 주민의 참여

“관광도시도 아닌데 웬 홍보 영상물”
불필요한 예산 35억 낭비 막아

◆5년째 주민과 함께 예산 심의=2006년 11월 과천시 서형원(현 의장) 의원과 황순식 의원은 ‘주민과 함께하는 예산 워크숍’을 열었다. 당시 과천시는 1억원을 들여 홍보 영상물을 만들어 해외 방송국에 송출한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그때 한 시민이 “과천시는 관광도시도 아닌데 무슨 내용으로 홍보 영상을 만들어 해외에 알리겠다는 거냐”며 “혹시 시장께서 유엔 사무총장 출마라도 염두에 둔 것이냐”고 비판했다. 이 발언은 시 측에 그대로 전달됐고 결국 영상물 제작비 1억원을 비롯해 불필요한 예산 35억원을 삭감하는 성과를 올렸다.

주민참여 예산심의는 이렇게 시작돼 5년째 이어지고 있다. 전문직 종사자, 퇴직 공무원, 시민운동가, 전업주부 등 60~70명의 다양한 사람이 참여 중이다. 서 의장은 “주민들의 의견이 전문적이고 수준이 높다”며 “사전 조사를 통해 조목조목 지적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세금 44억 날린 구리시 공무원 멀쩡, 왜

“고의성 입증되지 않았다”
지자체, 구상권 행사 포기

공무원의 잘못이나 나태로 수십억원의 세금을 낭비해도 해당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기는 쉽지 않다. 비리나 고의성을 입증해야 감사원의 변상명령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울화 치솟게 만드는 공무원의 세금 낭비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1999년 C개발회사는 경기도 구리시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동구릉 부근에 골프연습장을 지었다. 3년 뒤 시는 “문화재청과 협의가 없었다”며 사용승인 신청을 거부하고 건축허가까지 취소했다. C사는 구리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시 책임이 크다는 점을 인정해 C사에 44억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의회는 해당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라고 시장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는 구상권 행사를 포기했다. 세금만 고스란히 날린 꼴이다.

 2008년 11월 충주시는 단월동 건국대 사거리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했다. 행정감사에서 불법 전광판으로 적발돼 이전이 결정됐다. 비용으로 1억6000여만원이 들어갔다. 시 의회와 시민단체는 전광판 설치를 지시한 부시장에게 이전비용을 물어내라며 구상권 행사를 주장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유야무야됐다.

구리시 신동화 의원은 "요건이 까다로워 구상권을 행사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며 “세금을 낭비한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도록 시민이 적극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상권이 남발되면 시장·군수가 적극적으로 정책 판단을 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김평호 변호사는 “위법한 행정행위로 인해 예산을 낭비한 게 명백하다면 적극적인 구상권 행사를 통해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탐사부문=진세근·이승녕·고성표·권근영·남형석 기자, 이정화 정보검색사, 사진=오종택·김상선 기자
◆공동기획=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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