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에 자녀 데려가는 정용진 부회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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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호 02면

한 편의 시(詩)가 시인을 순식간에 최고 반열에 올려놓는 경우는 드물지만 가끔 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그렇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단 세 줄이다. 읽는 순간 찌르르 감전된다.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던가. 무엇이 올바른 삶일까, 한참 생각하게 한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얼마 전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말했다. 서른다섯 나이에 5·16 군사혁명에 참여했고 국무총리와 여러 정당 총재를 역임한, 대통령 빼놓고는 다 해 봤다는 그가 인생 황혼인 85세에 한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올해는 정치의 해가 될 것이라고 한다. 만일 JP의 정의대로라면 ‘허업의 해’가 되는 셈이다.

20여 년간 신문기자 하면서 수많은 정치인을 만나 봤다. 그때마다 ‘이분은 왜 정치를 할까’ 궁금했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권력이다. 그걸 잡으면 남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고개 숙이고, 존경하는 척이라도 하고, 부와 명예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해서일 게다. 하지만 그래서 정치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 다들 둘째 이유를 든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우리나라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국가와 민족, 정의와 복지, 세계 평화 등등의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그런 고결한 목적이 꼭 정치를 통해야만 이뤄지는 것일까. 솔직히 요즘 우리 사회가 정치로 인해 살기 좋아졌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오히려 정치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세계백화점 정용진(43) 부회장은 누가 봐도 우리 사회에서 혜택받은 사람이다.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외손자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다. 물론 그가 원해 그렇게 태어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도 자기가 원해 그런 건 아니다. 비옥한 토양에 떨어지지 않은 씨앗처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출발부터 혜택받은 사람들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도덕적 책무감은 거기서 출발한다.

정 부회장 같은 이들의 몫은 뭘까. 사업 번성하게 하고, 고용 더 많이 하고, 직원들에게 월급 더 주고, 세금 잘 내는 것이다. 꼭 정치를 하지 않아도 그게 애국이고 우리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한데 한 가지 더 있다. 원초적인 불행을 안고 태어난 우리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그게 당신이 아니고, 어쩌면 나일 수도 있었다는 마음 말이다. 물론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 부회장이 실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칭찬하고 싶다. 정 부회장은 몇 년 전부터 ‘어린이재단’(회장 이제훈)이 운영하는 장애영아원과 노인요양원 등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두 자녀도 데려간다. 어린이재단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 부회장의 아이들은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요샌 잘 어울린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건 정 부회장 측에서 한사코 취재를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의 해가 시작된다. 큰 권력을 꿈꾸는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퉈 경로당 찾아가 넙죽 절하고,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번쩍 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기자들 대동하고 가서 하는 그런 이벤트를 보면 기쁘기보다는 슬퍼진다.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여당이니 야당이니 하는 게 별로 의미 없고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도 허업이란 생각이 든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적 품성인 것 같다. 남부럽지 않게 가졌으면서 더 적게 가진 사람 몫까지 빼앗으려는 사람도 있고, 평등과 민중을 외치면서 인간성은 엉망진창인 사람도 적잖다. 이제 곧 구정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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