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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정략적 접근은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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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헌법은 나라의 근간이다. 국가의 뿌리와 줄기를 흔드는 개헌은 한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사다. 현행 헌법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공에 따른 소중한 결실이다. 처음 헌법을 만든 이래 39년 만에, 9번째 개헌으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된 국민의 헌법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개헌은 절대권력자의 농단에 불과했다. 그 권력의 농단을 끊은 것이 현행 헌법이다. 그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다.

 이후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국내외적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현행 헌법이 추방하고자 했던 독재권력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는 세상이 됐다. 현행 헌법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다. 24년간 법과 현실 간 괴리도 깊어졌다. 87년 이후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할 헌법의 개정 논의가 필요한 시점은 됐다.

 최근 정치권, 특히 여권 내에서 일고 있는 개헌 논의는 이런 시대적 부름에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여론의 호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일부 정치인들이 국가 대사인 개헌문제에 정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개헌 지지가 50%를 넘었지만 최근 30%대로 떨어졌다. ‘왜 그동안 약속은 안 지키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는 현시점에서 다시 개헌을 추진하느냐’는 국민적 추궁이자 의문의 반영이다.

 여야 정치권은 지난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원포인트 개헌’을 주장했을 때 ‘다음 국회에서 논의한다’고 합의했다. 대선을 앞두고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대선에 왜곡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렇지만 2008년 새 국회 출범 이후 개헌을 논의할 공식기구인 특별위원회는 출범조차 하지 않았다. 의원 연구모임과 의장 자문기구 등이 개헌안을 내놓았지만 구속력이 없는 가운데 개헌 논의는 허공에 떠버렸다. 현실적으로 개헌이 가능하려면 지난해 국회에서 개헌안이 확정됐어야 한다.

 정치권에서는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그런데도 최근 여권이 개헌을 밀어붙이는 데 대해 차기 대권경쟁을 염두에 둔 정략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이 여권 핵심관계자들만 부른 비밀회동에서 개헌을 거론한 모양새도 좋지 않다. 대통령은 원론적인 얘기만 했다지만 언급 자체가 여권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친이(親李·친이명박) 세력이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를 견제하고자 개헌 이슈를 띄운다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개헌 논의가 정치권의 소모적 논쟁과 분열을 조장할까 우려된다.

 집권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개헌 논의를 효율적으로,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책무가 있다. 정말 개헌을 하려면 우선 당내 이견부터 수렴해야 한다. 당론을 확정한 다음 야당과 협상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개헌은 서두르거나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며, 그런 식으로 처리되어서도 안 될 중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