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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싹 키우는 물가·성장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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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가기관과 행정조직의 구성과 운영은 과거 우리의 경험과 선진국들의 경험을 통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어온 것이다. 대개 수장(首長)의 임기를 정한 기관은 이들이 정치나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단기적 성과보다 장기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국가발전과 지속적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는 경험에서 나온 결과다. 중앙은행, 금융감독기관, 공정거래당국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기관이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시간을 통해 쌓아온 권위와 신뢰이며 이는 주요 국가자산이 된다. 현 정부는 이보다 더 좋은 국가경영 방식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1998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강화되었고 이후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자리를 잡아왔으나 이번 정부 들어 한은의 독립성은 잘 존중되지 않고 있다. 저금리 유지를 압박하며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물가안정은 대통령과 정부부처들이 직접 나서서 관리하고 있다.

 금융감독당국의 권위는 건전성이 의문시되는 대출의 확대, 공격적 덩치 키우기 등에 대해 선제적인 제재를 일관되게 가함으로써 세워지게 된다. 이미 부실이 커져버린 기관에 대해서는 공적자금을 동원해 구조조정을 하거나 퇴출시키는 것이 정도다. 상황이 다급하니 그러겠으나, 은행들의 팔을 비틀어 대출을 연장시키고 부실은행을 인수케 해 빚을 지게 된 감독당국은 이들을 제대로 감독할 수 없다. 또한 물가관리로 기업에 빚진 공정거래당국은 공정거래질서를 제대로 세우기 어렵다. 감독과 질서가 있어야 할 곳에 관리와 거래가 들어서게 된다. 부실이 커지고 시장이 흔들리면 다시 여기저기 막는 응급처방을 하고 나중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둑이 터지듯이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우리가 1970, 80년대 해왔던 이러한 정책운용이 그 뒤에 가져온 결과는 외환위기를 통한 막대한 비용 지불이었다.

 중앙은행, 금융감독, 공정거래당국의 수장은 원래 외롭고 시장과 정치권에 적을 만들기 쉬운 직책이다. 잔치가 무르익고 모든 사람이 즐거워할 때 술병을 치우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역할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경우 일견 양호한 경제성적표 아래서 거품과 위기의 소지가 자라고 기업들은 덩치를 앞세워 시장 경쟁과 활력을 잠식하게 된다. 이는 훗날 국가경제와 국민에게 막대한 비용청구서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국가는 이들의 역할을 소중히 보호해줄 책임이 있다.

 우리 경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빠른 회복을 하게 된 데에는 정부의 발 빠른 대응과 함께 외부적 요인도 큰 기여를 했다. 경쟁국들에 비해 훨씬 크게 절하된 환율로 인한 수출경쟁력, 중국경제의 고성장 지속이 없었으면 그렇게 좋은 성적표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적표에 지난 약 20년간 새싹을 키우듯이 길러온 시장질서를 허문 비용은 계상되지 않았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팽창적인 재정, 중소기업과 가계의 건전성을 불문하고 은행들에 대한 대출의 일괄 연장 지도, 초 저금리의 지속, 신용보증의 확대 등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위기 시에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지금도 정부는 거시정책으로 시장을 유인하려 하기보다 이를 직접 관리하려 하고 있다. 물가는 전 부처가 나서서 관리하면 되고 성장은 목표치를 정해 고지를 점령하듯이 밀어붙이면 이루는 것으로 믿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몇 해는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눌린 물가는 언젠가 튀어오르기 마련이고 앞당겨 쓴 성장은 훗날 경기 침체의 골을 깊게 할 뿐이다. 덕을 보았던 환율, 중국 요인 등이 전과 같지 못하면 성장률의 하락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에 공짜 점심이 없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정부가 더 중시해야 할 일은 가계대출 증가를 억제하고 경쟁력을 상실한 중소기업, 부실 건설회사, 저축은행 등에 대한 구조조정을 촉진하여 미래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것이라 보여진다.

 지금과 같은 정책운용이 지속되면 향후 위기의 싹을 키우게 된다. 위기나 깊은 침체가 오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서민들이다. 정부가 정작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편다면 나중에 서민에게 부담이 돌아가지 않도록 안정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제도 운영과 정책 방향을 택하기를 바란다. 우리 경제가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 이후 커다란 비용을 지불하며 제대로 구조조정을 하고 시장질서를 존중하는 정책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문득 보니 정책과 제도 운영이 과거로 돌아와 버렸다.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