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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타계] 남편·아들 곁에 소박하게 묻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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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고 박완서씨의 장례식이 25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뒤 운구 행렬이 성당을 나서고 있다. 고인은 용인 천주교공원묘지에 묻혔다. [김태성 기자]

생전 선생의 삶처럼 소박하고 간결한 마지막 길이었다. 22일 타계한 ‘영원한 현역’ ‘국민작가’ 박완서(1931∼2011)씨가 25일 땅의 품으로 돌아갔다. 차가운 땅이지만 20여 년 전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곳이다.

 고인의 장례절차는 쌀쌀했지만 화창한 날씨 속에 조촐하고 차분하게 진행됐다. 삼성서울병원 영결식에 이어 고인이 다니던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성당 장례미사, 장지인 경기도 용인 천주교공원묘지 안장식까지 어느 하나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신문·방송 취재진이 몰린 점이 달랐을 뿐 여느 평범한 장례식 같았다. 200여 명의 유족과 문인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8시42분. 서울삼성병원 영결식장. 하얀 천에 쌓인 관이 영결식장으로 운구돼 오자 장내가 술렁였다. 기도와 찬송 속에 고인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10분. 이동을 위해 관이 나가자 장녀 호원숙씨가 “엄마, 엄마…” 하며 흐느꼈다.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외침이었다.

 오전 10시 장례미사. 강론에 나선 김성길 신부는 “선생은 시골 장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낙네처럼 참으로 소박한 분이셨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평론가 유종호씨는 조사에서 “선생은 작가가 된 후 폭발적인 40년을 보냈다. 생동하는 인물, 설득력 있는 세목, 실감나는 대화, 감칠맛 나는 문장 등으로 책을 낼 때마다 뉴스가 됐고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고 했다.

 이어진 조시 낭독 순서. 단상에 오른 정호승 시인은 조시 ‘선생님 나목으로 서 계시지 말고 돌아오소서’(본지 1월 25일자 29면)를 낭독했다. 이해인 수녀는 조시 낭독 후 “하느님, 아름답고 훌륭한 어머니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유족들이 다시 한번 울먹였다.

 오후 1시. 고인의 묏자리는 남편 호영진씨 옆에, 외아들 원태씨의 묘를 앞세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인은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신앙으로 이겨냈다고 생전에 밝힌 바 있다. 아들의 묘를 앞에 두고 남편과 나란히 묻히게 된 고인의 관 위에는 흰 국화 꽃잎과 흙이 덮였다

 1시간여 안장식이 끝나자 유족 중 누군가 원태씨 묘 앞에서 “원태야, 엄마 왔다. 엄마가 너 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어이구…” 하며 애통해했다. 고인은 생전 한 글에서 죽어 아들을 다시 만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포옹도 오열도 아니다. 때려주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요놈, 요 나쁜 놈, 뭐가 급해서 에미를 앞질러 갔느냐”며 철썩철썩 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 아들 옆에, 사랑하는 남편 옆에 마침내 묻히게 된 것이다.

 이날 장례식에는 문학평론가 김윤식·김화영·정과리씨, 소설가 박범신·이경자·임철우·양귀자·김영현·은희경·김형경·조선희·심상대·방현석·공지영·강영숙·정이현·심윤경씨, 시인 이근배·김형영·정종연·민병일·이병률씨, 한국작가회의 구중서 이사장, 양숙진 현대문학 주간,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 세계사 최선호 대표,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 유인촌 문화부 장관,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 디자이너 노라노씨 등이 참석했다.

용인=신준봉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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