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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부서 아니라는데 유류세 인하 불씨 계속, 왜 … 2008년의 추억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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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유류세 인하?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어요.”

20일 주영섭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은 단호했다. 세제를 다루는 공무원은 늘 세금 감면에 인색하게 마련이라지만 유류세 인하에 대해서는 여느 때보다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다. 세금을 깎아주면 고유가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개인과 기업은 환영하겠지만 당장 세수를 축내고 재정 건전성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의 유류세 발언도 청문회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원론적 언급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최 후보자는 18일 인사청문회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유류세 인하를 적극 검토해 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유류세 인하 카드를 완전히 ‘꺼진 불’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2007~2008년의 정부 정책을 지켜본 학습효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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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고유가 대책을 발표했다. 당시는 한국 원유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두바이 유가가 사상 최고치에 가까운 85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듬해인 2008년처럼 배럴당 120~140달러까지 오르지는 않았을 때였다. 그때 정부는 에너지 절감과 효율성 개선, 석유제품 시장의 유통 구조 투명화 같은 원론적인 정책 처방을 내놓았다. 국회와 언론에서 휘발유·경유 같은 수송용 유류에 대한 유류세 인하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족한 대책’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세계 어느 나라 정부도 세금을 낮춰 기름값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나라경제 2007년 12월호)”고 반박했다.

 당시 정부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지금 정부 입장과 비슷하다. 첫째, 세금을 내린다고 휘발유·경유값이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1999년 5월 유류세를 L당 51원 인하했지만 휘발유 가격은 최대 9원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둘째, 유류세를 일률적으로 내리면 유류 소비량에 비례해 혜택이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대형 승용차를 굴리는 고소득층에 상대적으로 큰 혜택이 돌아간다. 요즘 말로 바꾸면 ‘공정사회’ 원칙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셋째, 세금을 깎아줘 기름 소비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어나면 결국 경제 전체가 치러야 할 비용이 그만큼 늘어난다. 유류 소비가 늘면 원유를 더 수입해야 하니 경상수지도 악화한다.

 그러나 2008년 정권이 바뀌고 원유가격이 더 뛰어오르자 정부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세계 어느 나라 정부도 안 한다던’ 유류세 인하 조치를 단행했다. 정부는 그해 3월 유류세 탄력세율을 한시적으로 10% 내리고 석유제품 관세율도 3%에서 1%로 인하했다.

 세금만 깎아준 게 아니라 보조금도 뿌렸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첫해인 2008년 ‘고유가 극복을 위한 민생 안정 추경예산’을 편성했다. 그해 가을 국회는 4조5685억원을 증액한 추경예산을 확정했다.

당시 유가 상승에 따라 한국 경제가 추가로 부담할 비용은 20조원으로 추산됐다. 정부는 전년도 세계잉여금과 유가 상승으로 인한 세수 증가 예상분 5조2000억원을 활용해 역대 최대 수준인 10조원 규모의 유가 대책을 발표했다. 근로자와 자영업자, 사업용 차량에 유가 상승에 따른 유류비 증가분의 절반을 유가 환급금으로 돌려줬다. 정부는 한국에서 처음 실시되는 획기적인 제도라고 자평했지만 일각에선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로 불거진 ‘촛불 민심’을 달래기 위한 다목적 포석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물론 2008년과 요즘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당시만큼 국제유가가 비싸지 않다. 가격 상승세도 그때보다 완만하다. 정부는 가계 등 경제 주체들이 이 정도 유가 흐름에는 아직 적응할 수 있다고 본다. “2008년엔 유가 급등으로 자동차 운행량이 확 줄면서 막히는 도로마저 줄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요즘 도로 사정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가. 2008년 유류세를 인하했지만 유류가격 인하 효과는 크지 않았다. 세수만 1조4000억원 축냈다.”(주영섭 세제실장)

 유류세가 가격이 아니라 L당 붙는 종량세인 만큼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세금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주장도 정부의 단골 레퍼토리다. 게다가 친환경 추세에 따라 탄소세 등 기름에 붙는 새로운 세금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할 입장인 정부로선 세금 깎아달라는 요구가 더 난감할 수 있다.

박춘호 재정부 환경에너지세제과장은 “우리나라 휘발유·경유에 붙는 세금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2개국 중 20위 수준일 정도로 낮다”고 말했다.

 일단 2008년과 같은 특단의 대책은 나오기 힘든 분위기다. 하지만 유가가 100달러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급등하게 되면 정책 처방도 달라질 수 있다.

익명을 원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2008년에 썼던 유류세 인하나 유가 환급금 같은 카드는 결국 청와대에서 정책적으로 판단해야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가가 현 수준을 유지하더라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물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유류세를 낮추는 건 어떨까. 주영섭 실장은 “물가를 잡기 위해 세금을 깎아주는 것은 하책(下策) 중 하책”이라고 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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