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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254) 박명림 연세대 교수 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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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4년 7월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왼쪽에서 둘째)이 백악관에 도착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당시 미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다. 대통령 퇴임 뒤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공산주의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승만 대통령보다 탁월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중앙포토]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신생 대한민국이 세계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다.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을 학계에서 명성이 높은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의 엄밀한 검증으로 되짚어 본다. 개인의 회고와 학문의 엄격성을 섞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1950년대 대한민국 부흥사의 막전막후를 조명해 본다.

이승만 제거론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이승만 제거’ 검토했던 미국 군부, 백선엽 불러 거사 모색했으나 이승만 힘 깨닫고 ‘에버레디’ 중지

박명림 교수

1953년 역사적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의 체결은 서세동점 이후 격동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로 인해 한국 역사상 가장 극심하게 요동치던 한국의 국제적·지역적 위상이 처음으로 안정되는 순간이었다. 조약 체결 이전 100년 동안 한국은 개항,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 강제병합, 식민통치, 아시아·태평양 전쟁, 미·소 분할점령, 남북 분단, 한국전쟁이 숨가쁘게 몰아치며 전례 없는 혼돈을 겪었다. 한·미동맹 구축은 한국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국제적 소용돌이를 종착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이토록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은 구조적으로는 공산침략의 결과였지만 구체적으로는 이승만의 벼랑끝 전술로 인한 첨예한 한·미 갈등의 산물이었다. 공산침략에 맞선 동맹국가 사이의, ‘긴밀한 협력’이 아니라 ‘심각한 갈등’이 한·미 안보조약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문제의 중심에는 이승만이 있었고, 최후의 조약체결까지는 53년 4~5월과 6~7월에 걸친 두 번의 격렬한 한·미 갈등의 파고를 넘어야 했다.

  휴전회담 초기부터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한 이승만은 53년 봄 휴전회담이 진척되자 유엔군 이탈, 단독북진 불사를 더욱 강력히 주장하며 미국의 종전정책에 저항했다. 이승만의 핵심적인 반대 사유는 ‘확고히 재침을 막을 장치가 없는 종전의 거부’였다.

 이승만이 휴전반대-단독북진을 표명한 직후인 53년 4월 26일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이승만 감금·제거 및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다시 검토했다. 미국은 이미 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에도 이승만의 대안(代案)을 모색했었다. 53년 4~5월 휴전 추진 당시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에 맞서 미국은 이중정책을 추진했다. 한편으로는 ‘상비계획(Ever ready operation)’을 입안하여 이승만정부를 대체하는 군사정부수립을 구상했다(5월 4일).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측과의 사전협의 없는, 공산 측과의 타협을 통한 종전정책의 강행이었다. 이승만의 반대를 넘어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 소환과 단독북진 주장을 포함하여 더욱 강력하게 저항했다. 미국은 결국 국무부와 합참 합동회의를 통해 ① 한국군을 동원해 이승만 감금 후 새 정부를 수립한다 ② 이승만의 휴전 동의 및 협조 시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한다는 두 개의 방안을 마련하여 격론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5월 29일). 다음 날 미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방안을 수용함에 따라 클라크 유엔사령관을 통해 이승만에게 “한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착수할 준비가 돼 있다”고 통고했다. 이에 이승만은 즉각 답신을 보내 “휴전이라는 방법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지으려는 당신의 의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답변했다(5월 30일).

 한·미 갈등이 첨예하던 상황에 이루어진 것이 바로 미 군부의 백선엽 참모총장 방미 초청이었다. 백선엽 초청과 아이젠하워 면담(5월 6일)은 이승만의 강력한 휴전반대로 인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테일러 미8군사령관을 중심으로 ‘상비계획’이 마련되던 시점이었다(5월 4일). 이 점이 중요했다. 백선엽은 당시 정치적 파벌에 물들지 않은 순수군인으로 평가받던 한국군 최고지도자였다. 게다가 상비계획을 입안한 둘은 백선엽의 전우였다.

 전쟁의 최후 향방을 좌우할 중대한 전국(戰局)이었음에도 현장 최고지휘관을 전장으로부터 빼내는 이례적 초청을 감행한 미 군부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전쟁 종전 문제의 향방과 관련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의지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타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 대안 모색의 실현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았건 몰랐건 백선엽은 미국이 고려하던 대안의 한 명이었으며, 동시에 미 군부가 전쟁지휘와 종결문제를 가장 긴밀히 논의해 오던 인물이었다.

 초청을 주도한 인사들 역시 이승만의 대안을 모색했던 군부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승만과의 결별을 포함한 모종의 조치가 발생할 경우 백선엽이 (이승만이 아닌) 자신들을 지지해줄 준비가 돼 있다는 암시를 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거꾸로 귀결됐다. 즉 백선엽의 아이젠하워 면담을 포함한 미국 체류기간 동안에 이승만을 대체하려는 상비계획은 중단됐고, 국무부와 군부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수용을 통한 종전 구상에 합의했다. 미국은 한국 군부의 최고지도자를 워싱턴으로 초대해 논의를 벌이던 중 군사정부 수립 방안을 폐기하는 한편,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던 것이다.

 미국은 백선엽의 방미를 계기로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한국정부와 국민·군부의 확고한 의지와 함께, 반(反)이승만 대안 모색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백선엽의 방미는 초청자의 의도와 달리 미국이 아니라 이승만을 도와줬던 것이다. 백선엽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군부가 주선한 아이젠하워와의 면담에서 한국군 역시 강력하게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원하고 있다는 점을 피력하며 이승만의 주장을 확고히 뒷받침했다. 게다가 그는 한국전 종전을 공약한 아이젠하워 면전에서 한국민과 정부의 휴전반대 강도와 의미를 강조했다. 백선엽과의 면담을 통해 미 국무부와 군부는 이승만의 군부 및 국민 장악이 거의 완벽하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미 군부의 백선엽 초청은 그들이 아닌 이승만의 승리로 귀결됐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이승만의 대미 강경 저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확보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공산 측의 요구를 수용한 미국의 휴전 의사를 다시 완강하게 거부하며 단독자결권 행사를 천명하는(6월 5일) 동시에, 백선엽 참모총장을 포함해 방미 중이던 육해공군 수뇌부의 즉시 소환을 명령하는 한편 도미 예정인 장성들에 대해서는 출발중지를 명령했다(6월 7일). 게다가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석방(6월 18일)으로 거의 해결 불가능한 수준의 한·미 갈등을 초래하며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모두를 대파국과 대타협의 막다른 갈림길로 몰아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초강수였다.

◆박명림 교수는 =한국전쟁이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비롯했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이른바 ‘수정주의 시각’을 치밀한 자료 수집으로 뒤집은 학자다. 북한과 소련 등의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추적해 쌓은 학문적 업적으로 그 이름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다. 한국 현대정치사를 가장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해석해 명성이 높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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